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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20년 06월 29일(月)
“18세기 조선 첫 정보화시대…다산, 지식 편집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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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 24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연구실에서 최근 출간한 ‘다산과 강진 용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 ‘다산과 강진 용혈’ 출간한 정민 교수

“고려시대 불교 성지‘용혈암’
다산과 불교 이어주던 가교
천책 스님 호산록에 매료돼
만덕사지 집필 디딤돌 역할”


“조선의 18세기는 우리 선조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정보화 시대’였습니다. 다양한 학자의 연구가 쏟아지면서 지식의 편집과 재배열이 중요해진 시기였지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펴낸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흩어진 정보를 모으고 다시 배열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에서 가장 위력적인 성과를 보인 사상가였습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10년 넘게 다산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정민(59)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다산을 위력적인 ‘편집력’의 사상가라고 했다. 지난 24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난 정 교수는 “무질서한 정보의 바다에서 핵심을 길어 올리는 다산의 ‘지식경영 테크닉’은 현대인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미덕”이라고 말했다. 고전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정 교수가 ‘다산의 재발견’ ‘다산 증언첩’ ‘파란’에 이어 또다시 정약용 선생의 학문적 발자취를 좇은 ‘다산과 강진 용혈’(글항아리)을 최근 출간했다.

그는 신간에서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불교 세계에 이끌린 다산의 유배 시절을 ‘강진 용혈’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더듬는다. 전남 강진군의 덕룡산 자락에 자리한 용혈암은 고려시대 불교의 성지(聖地)와도 같았다. 이곳은 무신 정권의 후원 아래 교세를 폭발적으로 확장해나간 종파인 ‘백련결사’의 수행지였으며, 고려 8국사(國師)로 이름을 떨친 천책·천인·정오 스님이 기거한 장소이기도 했다. 다산은 18년 동안 강진에 머무르면서 해마다 봄철이면 제자들을 이끌고 용혈암으로 소풍을 떠나곤 했다.

불교에 아무 관심도 없던 다산이 틈날 때마다 이곳을 찾게 된 것은 1805년 아암 혜장이라는 승려를 만나면서부터다. “아암은 다산이 낯선 강진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한 승려였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학문적 공감대를 발견한 두 사람은 몇 날 며칠이고 밤새 토론하며 지적 갈증을 해소하는 사이로 발전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암은 다산에게 천책 스님의 시문집인 ‘호산록’을 권했습니다. 용혈암을 명문으로 묘사한 이 책은 다산이 고려시대 백련결사의 흔적을 좇아 ‘만덕사지’를 편찬하는 디딤돌이 됐습니다. 말하자면 용혈암은 다산과 불교를 이어주는 가교였던 셈이지요.”

‘호산록’을 읽고 “천책은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이규보와 어깨를 나란히 해도 손색이 없는 문장가”라는 확신을 품은 다산은 이후 ‘용혈행’ ‘유용혈기’ 등의 저술로 고려 불교의 최전선에 있던 공간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기록은 대부분 다산의 작품을 한데 모은 문집에는 빠졌다. 유교와 불교의 학문적 통섭을 집대성한 ‘만덕사지’조차 다산이 주도적으로 편찬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정 교수는 “천주쟁이로 몰려서 귀양을 갔던 다산이 이번에는 불교에 빠져들었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자기검열을 한 결과”라며 “신간 작업을 위해 다산의 저술들을 새롭게 찾고 재배열하면서 불교와 다산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조선 초기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동문선’에 ‘호산록’의 시문이 대거 녹아 있다는 사실,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병풍인 ‘표피장막책가도’의 한쪽 구석에 적힌 글귀는 다산이 천책의 시구를 차운해 적은 것이라는 사실 등은 정 교수가 신간을 펴내면서 새롭게 확인한 성과들이다.

이처럼 용혈암은 불교 문화사적 의의가 상당한 곳이지만 현재는 일반인의 접근조차 어려운 폐사지로 방치돼 있다. 인근 채석장에서 날아오는 분진 때문에 올라가는 산길에는 늘 먼지가 가득하고, 과거 암자 터의 일부였던 정자와 연못 등은 자잘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지난 2013년 목포 민속문화유산연구원이 발굴을 진행해 청자 불상과 보살상 등이 출토됐으나 이마저도 일부 지점에서만 제한적으로 조사가 이뤄진 결과라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다.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유적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정 교수는 책을 내놓으면서 학문적 성과와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정책 당국과 지자체를 향해 현실적인, 하지만 학자로선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시골 산자락에 파묻힌 용혈암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웬만한 절의 암자보다 훨씬 풍부한 기록을 품은 장소입니다. 용혈암 터에서 200m쯤 올라가야 나오는 굴과 연못까지 아우르는 복원이 이뤄지면 강진군은 백운암터와 백련사, 그리고 용혈암으로 이어지는 ‘고려 불교문화의 관광 벨트’를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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