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실학자’ 이덕리 역사적 재조명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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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략 담긴 ‘상두지’ 출간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의 참화를 겪은 지 150여 년 뒤인 18세기 말, 국방 전략과 군사·무기 체계 개편 방안, 차(茶) 국제 무역을 통한 재원 조달 방안까지 집대성해 책으로 써낸 선비가 있었다. 책 이름은 ‘상두지(桑土志)’. 제목부터 지혜로운 올빼미가 큰비가 오기 전 뽕나무 뿌리(상두)를 물어다 둥지의 새는 곳을 미리 막는다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뜻을 담았다. 그러나 저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종종 다산 정약용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친형 때문에 20년 넘게 유배 생활을 하다 숨진 까닭이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이 번역해 펴낸 ‘상두지’(휴머니스트)는 살아서는 유배되고 죽어서는 잊힌 비운의 실학자 이덕리(李德履·1725∼1797)에 대한 역사적 복권이자 재조명 시도다. 한국 최초의 차 전문서 ‘동다기’(東茶記)의 저자이기도 한 이덕리는 1776년 친형 이덕사가 사도세자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역부도로 능지처참에 처해지면서 덩달아 진도로 유배됐다. 진도에서 19년여, 영암에서 2년여의 귀양살이 끝에 숨졌다.

‘상두지’는 ‘동다기’와 함께 이덕리가 진도 유배 시절 쓴 국방 책략서다. 근대 이전 조선에서 국방 전략 및 병법(소프트웨어)과 성곽·무기·군대체제(하드웨어)를 모두 다룬 보기 드문 책이다. 정 교수는 특히 이덕리가 막대한 국방 재원을 차 무역을 통해 조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에 대해 “일개 서생의 탁상공론을 넘어서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덕리는 둔전(屯田·군량 충당용 토지)에서 차를 재배해 무역할 경우 연간 800만 냥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덕리는 서문에서 양란이 끝난 지 오래고 청나라가 안정을 찾은 지 150년이 지났음에도 “규정과 법도를 하나로 통합해 흐리고 비 올 때를 대비하지 않고, 한갓 패거리 지어 자기와 다른 이를 배척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여러 관리의 계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자신의 비책을 임금께 전하겠다던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당연히 그의 비책도 사장되고 말았다. 이덕리의 불행한 삶에서 약 100년 뒤 조선의 망국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