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하나’ 아직 유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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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시민주의 전통 |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 이파리

포스트 코로나는 두려움의 시대 … 빗장 건 나라들로 국수주의 도래
‘국제사회’ 개념은 他國에도 도덕적 의무 진다는 것…이후 물질 재분배까지 확장
가족·친구에 대한 애착 넘어 국경 밖까지 연대하는 新 공동체 이상향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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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주의 전통’에서 마사 C 누스바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두려움의 시대’라고 말한다. 공포는 생각을 마비시켜 인류 전체가 공동 운명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국경이나 인종 따위에 좌우되지 않고, 인류 전체의 존엄성을 도덕적 의무로 받아들이게 하는 고귀한 사유의 전통이 있다. ‘세계시민주의’다.

세계시민주의는 키니코스학파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한마디에서 시작한다. 출신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코스모폴리테스(kosmopolites)라고 답했던 것이다. 이 대답으로부터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출신지, 지위, 계급, 성별 등’이 아니라 ‘공통된 인간성’으로 정해지는 어떤 사유의 가능성이 생겼다. 코스모폴리테스, 즉 세계시민이라는 말에는 ‘모든 인간의 가치를 조건 없이 인정하라’는 인간 존엄의 굳센 이념이 담겨 있다. 저자는 현실의 조건을 고려해 가면서 이를 장애인, 외국인은 물론이고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까지 확장하려고 애쓴다. 디오게네스는 인간 존엄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돈, 지위, 권력 같은 물리적 조건은 인간의 존엄성을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바라는 바를 물었을 때, 디오게네스는 “해나 가리지 말고 꺼져”라고 답했다. 이 사유는 물질적 소유가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 등 인간 존엄성의 여러 측면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귀한 생각이다. 내면의 별만 바라보는 인간은 외부의 어떠한 유혹도 무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 경험은 이를 부인한다. 물질은 인간 신체에 직접 작용하고, 인간 존엄을 제대로 사유하려면 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훌륭한 디오게네스는 광장에서 햇볕을 쬐면서 이를 잡아도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으나 한 사회에서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곧장 물질적 기여나 원조를 포함하는 ‘의무의 분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세계시민주의에 깃든 흠결을 따져 보면서 인간 존엄을 위한 현실적 조건들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로도스’다.

누스바움은 이를 위해 디오게네스 이후 서양에서 전개된 세계시민주의의 큰 줄기들을 하나씩 점검해 간다. 이 전통의 첫머리에 오는 중요한 철학자는 키케로다. 키케로에 따르면, 정의와 선행은 미덕의 양면이다. 그는 ‘정의의 의무’를 모든 관계의 중심에 놓는다. 국경과 무관하게 인간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타인의 소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키케로는 선행, 즉 물질적 원조의 의무 앞에서는 고귀함을 지키지 못하고 머뭇댄다. ‘사랑하는 사람들부터’라는 원칙을 슬쩍 들이민다. ‘국경 바깥의 사람들은 우리 자신에게 아무 희생이 뒤따르지 않을 때만 물질적으로 원조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고귀하지만 흠결 있는’ 세계시민주의의 원형적 사고를 이룬다. 현대의 우리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욕망의 제거’를 제안한다. ‘가족, 도시, 소속 집단에 대한 개인적이고 친밀한 연대를 끊어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음의 이러한 움직임은 인간이 정말로 추구해야 할 고귀함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일체의 욕망을 버리고 완전한 평온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저자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은 ‘가족, 아이들, 친구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는 선량함’일 뿐이다. 사랑할 만한 것이 없는 황량한 사막이 펼쳐질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세계시민주의는 근대 국가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현대 국가의 수많은 헌법은 인간을 그 자체로 고귀하게 대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심지어 칸트는 ‘인륜의 왕국’, 즉 이성적 인간이 모두 단결해 개별 국민 국가의 야망을 억누르고 영구 평화를 이룩하리라는 위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세계시민주의의 전통을 근대 세계의 규칙으로 삼은 것은 17세기의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였다. ‘국제사회’라는 개념을 실질적으로 발명함으로써 그는 한 국가와 그 국민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도덕적 의무를 진다는 사유를 전개했다. 교전 규칙을 마련하는 등 국제 질서에 도덕적 질서를 부여하고, 국제사회의 물질적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제기해 제한적이나마 원조라는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각국이 자율성 속에서도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이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국가는 ‘인간의 자율성과 연대를 위한 원천이자 도구’로서 사용될 가능성이 열린다.

18세기에 이르러, 세계시민주의는 애덤 스미스라는 도덕철학의 거장과 함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내면의 인간적 역량을 계발하려면 법적·경제적 안배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스미스는 꿰뚫어 본다. 그는 인류애를 추구할 때 반드시 보건이나 교육 영역에서 물질적 원조의 의무가 발생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물질적 재분배에 대한 국가의 노력을 강조하고, 이를 세계 전체로 확대한다.

이러한 긴 여행 끝에 누스바움이 도달하는 곳은 ‘물질주의적 자유주의 세계 정치’로서의 자리다. 저자가 주장하는 세계 정치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료 시민, 나아가 도덕적 의무를 국경 너머로 확장한다. 심지어 동물과 같은 지각 있는 생명체 전체에 대한 연대까지 고려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와 달리, 누스바움은 국가를 인간 자율성의 효율적 도구로서 정의의 의무와 물질적 원조의 의무를 수행하는 규범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일 수는 있으나, 세계 공화국이라는 칸트적 이념형을 부정하는 것으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더 나아가 저자는 국제인권법이나 해외 원조 문제에 대한 일종의 현실적 무력감마저 이야기한다. 물질적 원조 개념을 들여오자마자 이상이 물러서고 역량 접근이라는 실천적 방안이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린 느낌이다. 348쪽, 1만8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