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 침해 않는 한국인…‘빡빡한’ 문화에 길든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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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을 지키는 사회, 선을 넘는 사회 | 미셸 겔펀드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전란 잦았던 韓·재해 많은 日
일사불란한 질서·규율 잘 따라

스페인·美 등은 ‘느슨한’ 사회
규정된 線 넘어가도 넓게 용납

나라따라 자율성 제한 vs 혼란
적절한 균형이 문화충돌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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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네덜란드의 흐로닝언대 심리 연구소는 한 쇼핑센터 인근에 주차된 자전거 주인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하루는 골목 담벼락을 낙서로 뒤덮어 어지러운 환경을 만들었고, 또 다른 날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치워놓았다. 두 경우 모두 자전거 핸들에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을 걸어뒀다. 쇼핑을 마치고 나온 고객이 자전거를 타려면 전단을 치워야 하는데 연구소는 의도적으로 주변의 쓰레기통을 없앴다. 자전거 주인은 전단을 그대로 갖고 갔을까, 아니면 바닥에 버렸을까.

실험 결과 낙서로 뒤덮인 골목에서는 70%가 전단을 버리고 떠났으나 담벼락을 깨끗이 단장한 날에는 30%만이 길바닥에 던져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낙서 하나로 미세하게 환경을 조정했을 뿐인데 결과가 왜 이렇게 달라진 것일까.

‘선을 지키는 사회, 선을 넘는 사회’는 국가 공동체를 지배하는 규범의 강도가 개인의 일상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인 미셸 겔펀드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는 문화 규범 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30여 개국에 흩어진 약 7000명을 표본으로 삼고 조사를 진행한 저자는 각 국가를 ‘빡빡한 사회’ 혹은 ‘느슨한 사회’로 분류했다.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중심으로 점수를 매겨 보니 스페인·미국·그리스·베네수엘라·브라질은 규범의 강도가 느슨한 축에 속했다. 반대로 파키스탄·말레이시아·한국·일본·독일은 사회를 옭아매는 규범이 매우 강력한 국가였다. 규범이 느슨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대학생이 수업 중에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간식을 먹는 사례가 흔했다. 심지어는 파자마를 입고 강의를 듣는 학생도 있었다. 반면 규율이 센 나라의 시민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공원·식당·은행 등의 공공장소에서 정숙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저자는 네덜란드의 ‘자전거 실험’ 역시 이런 조사 결과와 맥이 닿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낙서로 적당히 더럽혀진 골목에서는 다수의 피실험자가 무의식중에 ‘규범이 빡빡하지 않은 환경’이라고 인식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빡빡함이나 느슨함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책은 재난과 질병,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정도가 규범의 강도를 결정짓는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화산 폭발과 지진 등 반복적으로 자연재해의 습격을 받는 일본은 생존을 위해 일사불란한 질서와 규율을 갖춰야 했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으로 국민의 20%가 목숨을 잃고 20세기에는 소련에 점령당한 독일 역시 끊임없는 물리적 충돌과 위협으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보다 강력한 규범을 체화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한국을 “이웃 국가들에 여러 번 얻어터진 나라”라고 표현하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의 역사와 사회 규범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기도 한다.

규범의 강도에 따른 사회 분위기가 언제나 고정불변인 것은 아니다. 느슨한 규범이 초래한 혼란과 불안은 때때로 강력한 감시체계에 대한 구성원의 열망을 낳는다. 2016년 6월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 6개월 만에 7000명 이상의 범죄자를 사살했다. 끝없이 치솟는 실업률, 갈수록 심해지는 빈곤율, 만연한 범죄와 무질서가 끔찍했던 시민들은 아직도 폭압적 카리스마로 무장한 두테르테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로 다른 규범을 지닌 두 집단이 만날 때는 불가피하게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국가뿐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지난 1998년 합병 이후 불과 9년 만에 갈라선 미국 크라이슬러와 독일 다임러-벤츠의 사례가 특히 흥미롭다. ‘하늘이 맺어준 결혼’이라는 업계의 평가를 낳은 이 합병을 통해 다임러-벤츠는 10만 달러가 훌쩍 넘는 메르세데스-벤츠 세단보다 저렴한 자동차를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일반 대중을 주요 고객층으로 삼았던 크라이슬러는 유럽의 고급 세단 시장에 대한 공략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각자의 부족함을 완벽하게 채워준 업계 거물의 만남은 양립하기 힘든 문화적 차이 때문에 곧 틀어졌다. 미국인 직원들은 ‘거래처 사람 앞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지 말라’는 독일 간부의 훈수가 언짢았다. 독일 출신들은 직함과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르는 미국인들의 문화가 영 불쾌했다. 이런 갈등이 누적되자 다임러-벤츠는 크라이슬러 미국 사업부 수장을 독일인으로 교체하고 크라이슬러 직원 수천 명을 정리해고했다. 국경을 초월해 한 쌍을 이룬 두 회사가 2007년 ‘파혼’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책은 이처럼 풍부한 사례와 통계를 통해 규범의 차이가 낳은 변화무쌍한 세상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다양한 실험 결과와 역사적 맥락을 토대로 제시되는 덕분에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빡빡함과 느슨함의 ‘렌즈’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설명해줄 뿐 아니라 곧 폭발할 갈등을 예측해 피할 길을 알려준다”며 “지나친 빡빡함은 자율성을 제한하고, 과도한 느슨함은 혼란을 초래하는 만큼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다.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개별집단을 미리 정해놓은 범주에 억지로 집어넣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이 간혹 발견된다. 상류층의 사람들은 규범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하류층보다 교통법규를 더 자주 위반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일본처럼 빡빡한 규율을 내재한 사회는 범죄를 억제한다고 단정하는 부분 역시 2000년대 후반 이후 해마다 여러 건씩 ‘묻지마 살인’이 벌어지는 일본의 사회병리학적 이면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448쪽, 2만 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