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억눌림에 詩人의 자아 버린 백석, 작가로서 동병상련 느껴”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8년 만에 발표한 장편을 통해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의 생애를 복원한다. 김동훈 기자

- 8년만에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 펴낸 소설가 김연수

시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7년
당의 지침과 문학관 충돌 등
‘고독과 고뇌’ 세밀하게 담아
북한 사회에서의 참담한 삶
끊임없는 선택 강요에 절망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백석이나 저나 작가로서 고민의 지점은 같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변했고,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 또한 바뀌었다는 거죠. 동병상련을 느꼈고 용기도 얻었어요. 순응 대신, 옳다고 믿는 것들의 ‘선(線)’을 지키자…. 백석이 평양에서 쫓기듯 삼수로 떠날 무렵의 나이가 되니, 좀 알 것도 같더라고요….”

소설가 김연수(50)가 신작 ‘일곱 해의 마지막’을 펴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으로, 월북 시인 백석(1912∼1996)이 시 쓰기를 중단(했을 거라고, 김 작가는 짐작했다)하기 직전의 일곱 해를, 실제와 상상 그 어디쯤에서 세밀하게 복원해 낸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변한 세상, 그것도 사회주의리얼리즘만이 ‘정답’이었던 북한 사회에서, 시인은 무슨 생각을, 또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이를 어떻게 말과 글로 드러냈을까. 그리고 선택의 기로 앞에 섰을 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사랑과 존경, 위로와 소망을 담아 ‘우리가 모르는’ 백석의 ‘비워진’ 삶을 꾹꾹 채워 넣은 김 작가를 지난 1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책이 막 출간된 이날은 마침 백석의 생일이기도 했다.

“원하는 대로 시를 쓸 수 없었던 기행(백석의 본명으로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을 잘 알고 싶은 마음에 소설을 시작했어요. 내 맘과 겹쳐지는 그의 맘이 궁금했어요. 당시 북한 사회와 문단의 상황, 더 나아가 소련을 비롯한 세계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개인의 선택을 강요했는지, 그리고 개인은 어떤 마음으로 선택을 했는지까지….”

백석은 알려진 게 많으면서도, 알려진 게 너무 없는 시인이기도 하다. 출판계 초판본 열풍을 일으켰던 시집 ‘사슴’, 동명의 뮤지컬로 제작될 만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나타샤’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과 기생 자야(김영한)와의 연애담 등이 있지만, 전쟁 후 러시아문학 번역을 주로 하던 그가 1956년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가, 1962년 ‘나루터’라는 동시를 끝으로 절필을 하고, 1996년 세상을 뜰 때까지 30여 년을 ‘시인’이 아니고자 했던, 그 심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실존 시인 이상을 모티프로 한 ‘굳빠이, 이상’으로 20여 년 전 소설가로서 첫발을 떼었다. 또다시 실존 시인을 이야기하는 건, 본래 시인이었던 작가의 정체성과도 닿아 있다.

그는 ‘긴 침묵’에 들어가기 직전의 백석을 소환, ‘시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일곱 해를 그리는데, 당의 지침과 문학관이 충돌하면서 겪는 좌절,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일깨워준 러시아 시인 벨라와의 인연, 내적 균열의 기폭제가 된 작가동맹 동료의 죽음, 쫓겨간 삼수에서 마주한 분열된 자아 등 주로 백석의 고독과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인상 깊은 건, ‘시인’으로서의 자아를 버리기 전, 백석은 가장 간절히 ‘시인’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버드나무 몇 그루 아래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며 기행은 누군가의 명백한 악의마저도 자기 운명의 일부로 여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137쪽)

그러나 현실에서도, 또 소설 속에서도 백석은 결국 ‘쓰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 ‘선택’은 소설 초반에 암시된다. 백석보다 먼저 숙청된 소설가 상허를 묘사한 장면이다.

“해와 달의 이야기를 할 때, 상허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표정이 사라졌다. 기행은 그 무표정이 반가웠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85쪽)

김 작가는 “백석은 쓰지 않음으로써, 지금의 ‘백석’이 됐다”면서 “어떤 순간에는 ‘안 쓰는 것’이 위대한 글을 쓰는 것과 버금가는 일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릴 땐 하고 싶은 걸 하고,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쓰지 않을 수 있는 힘, ‘삼가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요. 그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세상이고, 어른이 짊어지는 ‘고통’이죠. 그게 뭐든, 삼가지 못해 망하는 걸 우린 너무 많이 보잖아요.”

인생으로부터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았던 백석은 삼수군 협동조합에서 일하며 ‘붉은 작가’로 ‘개조’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는데, 이 순간 내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한 그 언어와 문자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기행은 궁금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인가, 당의 것인가? 인민들의 것인가? 아니면 수령의 것인가?”(190쪽)

이어지는 답변은, 백석을 대신한 김 작가의 목소리이자, 30년 가까이 글쓰기에 매진해 온 김 작가 스스로 내어놓은 명제이기도 하다.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191쪽)

작가로서 매우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참담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결말’을 미리 알고 보기에, 그 슬픔을 견딜 만하다. 바로 백석이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는 사실. 김 작가는 “백석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자신의 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라면서도 “그 후의 일을 알고 있기에, 지금의 시선을 담아 창작한 소설은 그래도 좀 따뜻한 기운이 있다”고 설명했다.

백석이 삼수로 쫓겨나던 때는 40대 중반으로, 김 작가가 이 소설 집필에 들어간 때와 비슷하다. 그런 ‘연(緣)’에서였을까. 책에는 절대 실재하지 않았을 장면이 하나 나온다. 1937년 어느 여름날, 해변에 누운 백석이 덕원 신학교 악단이 연주하는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라는 바흐의 칸타타를 듣고 있는 것. 당시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20세기의 기행에게 주는 21세기 작가의 선물이다. “이번 작업을 하며 제가 듣고 위로받았던 음악인데… 젊은 백석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요.” 248쪽, 1만35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