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 인터뷰 >홍석천 “20년前 커밍아웃한 날 안아준 이태원… 지금은 내가 품을 차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18일 서울 이태원에서 만난 홍석천은 인터뷰 내내, 골목을 지나다 끊임없이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창문 너머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태원 식구이자 동네 주민인 그들은 홍석천의 미소를 통해 작은 희망을 보는 듯 했다. 신창섭 기자

- 클럽發 코로나 사태 두 달 텅 빈 이태원 골목 지키는 홍석천

발길 90% 줄어… 부담·책임 교차
지난달 닫았던 레스토랑 문 열어
요리 공부 마친 딸과 의기투합

누나 아이 입양… 부모로서 10점
한국서 상처받을까 유학 보냈는데
많이 외로웠다 얘기… 억장 무너져

다시 돌아가도 커밍아웃은 할 것
어린 性소수자 롤모델 되면 만족
나 자신 솔직히 드러내서 행복해

이태원 클럽발(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지 한 달여가 흐른 지난달 18일, 서울 이태원 해밀턴호텔 뒷골목에서 방송인 겸 배우 홍석천(50)을 만났다. 이태원의 최대 번화가로 꼽히는 이곳에 인적은 드물고, 차들만 오갔다. 예전에는 발 디딜 곳이 없어 차가 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곳이다.

얼마 전 영국 BBC는 홍석천과의 인터뷰를 길게 다뤘다. 대한민국 연예인 최초로 성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을 한 지 꼭 20년이 되고, 코로나19로 얼룩진 이태원과 성(性) 소수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현재를 살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국내보다 외신이 먼저 듣고 싶었던 셈이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성 소수자인 홍석천. 그에게 이태원은 반(半)백 년 인생의 절반을 산 ‘제2의 고향’이다. 그래서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 이태원을 지키는 홍석천의 마음은 아프고 애달프다. 1시간여 인터뷰를 나누는 동안 홍석천은 참 바빴다.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유난히 큰 창 너머로 골목을 오가는 이들이 수시로 인사를 건넸다. 동료 상인을 비롯해 이태원이 터전인 외국인, 가끔 그의 레스토랑을 찾는다는 손님도 있었다. 이곳에서 홍석천은 TV에 출연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동네 주민이자 레스토랑 주인, 그리고 맘씨 좋은 동네 형이자 오빠였다.

―골목 어귀에 ‘이태원을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쓴 현수막이 눈에 띈다.

“상인회에서 이태원을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어요.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요즘은 이태원이 가장 안전한 것 같아요. 어느 상권보다 인적도 드물고, 더 방역을 철저히 하니까요. 그럼에도 ‘다시 이태원으로 오시라’고 말씀드리기가 참 어렵네요.”

―이곳을 찾는 발길이 얼마나 줄었나.

“90% 정도요. 올해 초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덕분에 한창 분위기가 좋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죠. 1995년 이태원에 정착하고 2002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는데, 25년을 통틀어 요즘이 가장 한적해요.”

―지금 이 시점에 BBC가 ‘홍석천’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었나.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이태원을 향한 혐오와 차별, 그리고 이 지역이 가진 상징성에 대해 물어봤어요. 20년 전 제가 커밍아웃을 하고 대한민국에서 성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죠.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제가 이런 질문을 받는 상징적 인물이라는 것이 현 사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지난 2000년,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여전히 ‘일대 사건’이라 불린다. 지난 20년간 무엇이 달라졌나.

“당시 신문 1면 제목이 ‘나는 호모다’였어요. 출연 중이던 방송을 모두 그만둬야 했죠. 20년이 지난 지금, 제가 방송에도 출연하고 이렇게 인터뷰도 나누는 걸 보니, 뭔가 바뀌긴 바뀐 거죠?(웃음) 대중이 홍석천과 성 소수자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볼 기회가 된 것 같아요. 며칠 전에는 스무 살 친구 3명이 밥 먹으러 와서 성 소수자임을 제게 고백했어요. 그 중 1명은 이미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는데 ‘너는 그냥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행복하면 다 괜찮다’라고 해주셨대요. 큰 틀은 아직 바뀌지 않았더라도 각자의 일상에서는 작은 변화들이 생기고 있어요.”

―그 이후엔 커밍아웃을 한 유명인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커밍아웃 여부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줄 것인가.

“저는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입장이에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도 크게 다치기 때문에, 아직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얘기해줘요. 일상이 박살 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시련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경제적 독립이 돼 있느냐’를 먼저 물어요. 다행히 2000년의 홍석천은 그 준비가 돼 있었어요. 20대 후반에 인기도 맛봤고 돈도 벌어놨기 때문에 1∼2년 정도는 버틸 자신이 있었죠. 그런데 제 생각보다 그 여파가 길더군요. 커밍아웃 후 드라마 ‘완전한 사랑’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 반이 걸렸어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법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이 같은 반응이 온다는 것이 참 많이 괴로웠죠.”

―만약 다시 2000년으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커밍아웃을 할 것인가.

“저는 할 거예요. 왜냐고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중요한 일인지 잘 아니까요. 제게 조언을 구하려는 성 소수자들 대부분이 행복하지가 않아요. 자신의 원초적인 부분을 가리고 산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에요. 제 삶이 100% 옳거나 완벽하진 않아요. 하지만 저 홍석천이 겪은 일과 과정이 저보다 어린 성 소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저는 만족해요. 적어도 저의 경우엔 롤모델로 삼을 전례가 없어서 더 힘들었으니까요.”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사태로 성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많이 아쉽고 서운해요. ‘이태원 클럽=게이 클럽’이라는 분위기와 함께 부정적 인식이 형성됐죠. 미디어에서 너무 자극적으로 다룬 것 같아요. 이후 기자협회에서 몇몇 선정적 보도에 대해선 ‘성 소수자 혐의 보도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언론중재위원회에서도 이런 보도들에 대해 시정권고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요.”

―당시, 이태원 클럽에 들렀던 성 소수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으라고 독려했던 SNS 글이 화제를 모았다.

“성 소수자들은 성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폭로되는 ‘아우팅’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에서는 본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의 건강과 안전이 가장 중요하죠. 게다가 ‘익명 보장’ 검사가 가능한데 이런 부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더 숨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며 ‘용기를 내달라’고 당부한 거고, 다행히 많은 이들이 용기를 내준 것 같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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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코로나19 사태 때 홍석천에게 ‘입장을 밝히라’는 의견과 ‘왜 홍석천에게 책임을 지우냐’는 의견이 충돌하기도 했다. 어떤 느낌이 들었나.

“그런 의견 충돌의 중심에 서는 것이 이제 익숙해요. 제가 20년간 이태원에서 장사하며 ‘이태원 알림이’ 역할을 해왔고, 대표적 성 소수자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맞물린 이태원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다는 주장도 충분히 수긍이 가요. 다만 이 중대한 일에 대해 제가 마치 대표성을 띤 사람처럼 발언하는 것이 자칫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고민이 컸죠. 제가 그때 SNS에 글을 올린 것은 누군가의 대표가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를 걱정하는 국민이자 성 소수자의 한 사람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했을 뿐이에요.”

―폐업이 속출하는 상황 속에서 지난 달 닫았던 레스토랑을 재개장했다고.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3월부터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마이첼시를 휴업해왔어요. 지금도 닫혀있는 가게가 적지 않은데, 손님이 와야 장사가 되는 것도 있지만 장사를 해야 손님이 오지 않을까요? 그 사이 내부 공사를 하고 메뉴도 바꾸었어요. 코로나19로 인한 강제 휴업이 아니라 더 나아지기 위한 기회로 삼고 싶었어요.”

―이번 재개장이 또 다른 의미라는데.

“미국 뉴욕 인근의 요리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딸 주은이가 돌아왔어요. 마이첼시에서 함께 일하고 있죠. 올해 스물다섯인데, 인건비 아끼겠다고 밤새워가며 직접 나무 바닥을 까고 페인트칠 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더군요. 마치 20년 전 이태원에 터를 잡아보겠다고 무작정 들이대던 30대 초반 제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죠.”(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딸 주은 씨는 쉬지 않고 분주히 움직였다).

―홍석천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여전히 모르는 이들이 많지 않나.

“(웃으며) 제 딸 맞아요. 그리고 아들도 있죠. 지난 2008년 이혼한 누나의 두 아이를 입양해 제 호적에 올렸죠. 조카이자 딸과 아들이에요. 누나랑 같이 키우는데 누나가 친권 및 양육권 문제로 고생할 것 같고, 온전히 제 아이로 키우기 위해 법적으로도 보호자가 돼야 한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둘도 홍씨예요. 초등학생 때 가족이 됐는데,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이태원으로 와서 함께 일하겠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2020년은 제게 더 특별해요.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거죠.”

―입양 가족을 향한 선입견은 없었나.

“그 선입견을, 누구도 아닌 제가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 적이 있어요. 저는 두 아이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간 적이 없어요. 속으론 너무 가고 싶었죠. 제 딸과 아들인데요. 하지만 제 성 정체성 때문에 ‘홍석천의 딸과 아들’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할까 걱정돼 철저히 뒤로 숨은 거죠. 그런데 두 아이가 그게 너무 서운했다고 하더군요. 두 아이는 이미 친구들에게 제 존재에 대해 모든 것을 이야기했던 거죠. 요즘 아이들의 가치관과 생각도 모른 채 혼자서 제 가치관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이 너무 창피했어요.”

―부모로서 홍석천은 몇 점인가.

“전 제가 잘하는 줄 알았어요.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게 해주려 노력했죠. 적잖은 부담을 안고 두 아이를 유학 보낸 것도 한국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받고 상처 입을까 걱정됐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두 아이가 ‘참 많이 외로웠고, 엄마랑 삼촌이랑 있는 게 더 좋다’고 말할 때는 억장이 무너졌죠. 부모는 아이들의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알아야 하는데, 저는 못 알아챈 거죠. 두 아이를 호적에 올리고 부모가 된 지 12년이 흘렀는데, 저는 아직 부모로서는 10점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홍석천에게 2020년은 어떤 의미인가.

“한 마디로 ‘새 출발’이에요. 50대가 됐고, 커밍아웃한 지 20년이 흘렀으며, 요리 공부를 마친 딸이 제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죠. 그리고… 모든 일상을 바꿔버린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어요. 예전에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와 같이 목표가 구체적이었다면, 이제는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을 자주 떠올려요. 50대는 더 이상 청춘은 아닌가 봐요.”

―홍석천은 왜 이태원 알림이이자 지킴이를 자처하나.

“대학 졸업 후 상경해 처음 정착한 곳이 이태원이었어요. 그리고 커밍아웃 후 방송 출연은 고사하고 모두가 외면하는 저를 안아준 유일한 곳이죠. 외국인과 성 소수자가 비교적 많은 이태원은 저라는 존재가 섞여 있기에 자연스러운 곳이었죠. 주변에서는 ‘왜 이태원을 고수하냐?’고 물어요. 사람이 더 많이 몰리는 곳에서 장사하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 제가 이태원을 등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웃으며) 기자님도 ‘홍석천마저 이태원을 떠났다’라고 기사를 쓰지 않을까요? ‘이태원 지킴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부담과 책임, 그리고 애정이 교차해요. 2000년에 이태원이 저를 품었듯, 지금은 제가 이태원을 품고 빚을 갚을 기회라고 생각해요.”

―또 다른 20년이 지난 후, 2040년의 홍석천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단언컨대 이태원 언저리에 있을 거예요. 저는 이태원으로 접어드는 초입부터 기분이 좋아져요. 이렇게 재미있고 예쁜 동네가 또 있을까 싶어요. 농담을 보태자면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해외 여행을 가기 어렵잖아요. 이태원에 오면 세계 각국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요. 외국 분위기를 가장 손쉽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이태원입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