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文 스스로 망친 베를린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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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워싱턴 특파원

3년 전인 2017년 7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오늘, 베를린의 교훈이 살아 있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 구상을 말씀드리려고 한다”며 5대 원칙과 4대 제안을 발표했다. ‘베를린 평화 구상’이라 불린 이 선언은 문 대통령이 추진 중인 한반도 정책의 골격이다. 문 대통령이 밝힌 5대 원칙은 △핵과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남북한이 함께 번영하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정치·군사적 상황과 남북 교류협력 사업분리였다. 5대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4대 제안은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 해결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 행위 상호 중단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을 위한 남북 간 접촉과 대화 재개였다.

3년이 지난 오늘, 제대로 성사된 것이라고는 일회성 이벤트였던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뿐이다. 5대 원칙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고, 4대 제안 중 군사분계선 적대 행위 상호 중단이나 남북 간 접촉·대화는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도발로 도루묵이 됐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이 사상누각이 된 근본적 원인은 북핵에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북핵 폐기를 목표로 한 ‘핵 없는 한반도’가 아니라, 북핵을 인정하고 그 그늘에서 생존하는 ‘핵 있는 평화’를 추구했다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남·북·미 간 비핵화 외교 비화를 보여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모습이 수차례 드러난다. 볼턴 전 보좌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판문점 회동(2018년 4월 27일)을 한 이튿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김 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으며 1년 내 비핵화에 동의했다며 판문점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9월 4일 트럼프 대통령이 전화 통화에서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자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과 비핵화 약속을 이행할 거라고 달랬다. 하노이 2차 정상회담 파행 후에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가 불가역적 비핵화의 첫 단계라는 주장도 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4월 11일 백악관에서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판문점이나 미군 군함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안을 제시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거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태도를 보면 1년 내 비핵화는커녕 비핵화 자체에 나설 뜻이 없다는 점이 명확하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지금도 북한의 비핵화 움직임과 상관없이 남북 경협 속도를 높이는 데만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제사회와 미국의 대북 제재로 인해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을 각오하지 않는 한 추진이 불가능하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북핵 폐기라는 대전제 하에서만 실행이 가능한데 이를 외면함으로써 베를린 선언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북핵이 존재하는 한, 한반도 비핵화·항구적 평화체제 구축·한반도 신경제지도·남북 교류사업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문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에서 공언한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말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