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남’ 은근한 선긋기… 상식의 탈 쓴 ‘일상 속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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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性·인종·정치 문제·사법체계…
‘나보다 떨어지는 너’ 비교하며
우월감 느끼고 은밀하게 차별

‘워킹대디’ 표현 쓰지 않는것도
‘육아 = 여성 몫’ 전제 깔려있어

정치 이념 다르다고 ‘敵’ 규정
혐오·조롱으로 공론 가로막아

“재능없고 게을러서 가난한것”
‘공정 세상’ 이론, 약자에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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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오스트리아 TV 프로그램 ‘일상 이야기’의 토막 영상에는 한 이주 여성의 인터뷰가 나온다. 오래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건너온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스트리아로 왔을 때만 해도 이주민들은 이 나라에 큰 도움이 되는 일꾼들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이주민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생활 태도가 제멋대로인 데다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나 빼앗아요. 한마디로 백해무익한 존재죠.”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사회 곳곳에 웅크린 은밀한 ‘경계 짓기’의 작동 원리를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책이다. 오스트리아 사회학자인 저자는 ‘우리’와 ‘남들’을 가로지르는 구분이 폭력적인 차별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이론과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파헤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통해 우월감을 누리고 싶어 하는 존재다. 이 목표가 순조롭게 달성되려면 주변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열등한 범주로 밀어 넣어야 한다. ‘우월하다’는 것은 언제나 ‘나보다 뒤떨어지는 남’과의 비교 위에 솟아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일상 이야기’에 등장한 이주여성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이주민과 ‘한통속’으로 묶이지 않고 현지 주민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 심술 가득한 어조로 이주민을 깎아내린 것이다.

전통적인 성(性) 관념이 많이 허물어졌으나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차별적인 시선 역시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한국은 물론 저자가 활동하는 유럽에서도 ‘워킹 대디’라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는다. 차별의 뉘앙스가 가득한 ‘워킹 맘’이라는 말만 흔하게 사용할 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육아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몫’이라는 전제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은 박수 치며 치하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로”로 여기는 분위기가 곧 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미국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총기 사고를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의 측면에서 설명한 대목도 흥미롭다. 미국에서 1982년부터 2018년 초까지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은 총 97건, 이 중 94건은 남성이 저지른 범죄였고, 범죄자 중 대부분은 중산층 백인 남성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들 총기 사고의 원인으로 가장 빈번하게 지목되는 게 범인의 정신질환인데, 사회학자 잭슨 카츠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심리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생긴 정신질환 때문이라면 왜 가난한 소수 인종이나 여성들은 총기 난사를 거의 일으키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다. 카츠가 발견한 범인들의 공통점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동급생들 사이에서 ‘남자답지 못한 못난이’로 인식됐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주류 백인 남성 사회가 기대하는 성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이들이 갖은 편견에 시달리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는 풍토를 지적하는 장(章)은 마치 한국 사회에 대한 사례 연구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독일 작가 고트홀트 레싱은 18세기 희곡 ‘현자 나탄’을 통해 인간은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하지만 25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세상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나쁜 인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진정한 다양성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수구꼴통’ ‘좌빨’ 같은 거친 혐오와 조롱의 언사가 건강한 공론장을 가로막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여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다.

사회적 약자에게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는 ‘공정한 세상’ 이론 역시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민낯을 아프게 비춘다. 이 이론은 ‘세상이 충분히 공정하므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기 마련’이라는 잘못된 명제를 상식으로 만들고, 이 상식은 다시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속 편히 규정하게 한다. 잘난 사람은 본인의 능력이 출중하고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반대로 재능도 없고 게으른 사람은 평생이 고달픔의 연속일 뿐이라는 식이다. 책은 ‘공정한 세상’ 이론이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을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해악이 크다고 비판한다.

일상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회복하는 일을 넘어 사법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단락도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저자는 ‘큰 도둑은 놓아주고 좀도둑만 잡는다’는 독일 속담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의심한다. 자잘한 절도범은 걸맞은 형량을 꼬박꼬박 부여받는데 엘리트 경제 사범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모습을 보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구글·아마존·나이키 같은 다국적 기업이 조세 회피처를 통해 은닉한 이윤은 2015년 한 해에만 62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런데도 당국은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 조사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여태껏 수사를 미적대고 있다. ‘부자 엘리트만 만나면 스스로 녹아 부드러워지는’ 법 앞에 만인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성·인종·정치·범죄 등 다양한 키워드를 가로지르며 먼 길을 돌아왔으나 결국 저자가 꿈꾸는 것은 나와 다른 남을 존중하는 사회, 한발 앞선 자가 뒤처진 자를 끌어주고 배려하는 세상이다.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당장 실현이 쉽지 않은 이 소망은 몇 줄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요약된다. “차별과 구분은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친다. 연대와 품위, 공감의 자리가 필요하다. 함부로 타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바람이다.” 260쪽, 1만6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