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피티>거리의 벽화, 벽을 허물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홍대거리의 복합문화공간 NVM 벽화를 함께 그린 그라피티 작가들이 포즈를 취했다. 뒤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락카, 엔조, 로열독, 제이플로우. NVM 제공

제도권 밖 떠돌던 비주류 예술… 전시·공공미술·호텔벽화 등으로 폭 넓혀
거리 미술의 효용성에 대한 재발견은 반갑지만… 자유·저항정신 퇴색 우려도

거리 미술(Street Art)이 ‘안’으로 급격히 들어오고 있다. 흔히 ‘낙서 벽화’라고 불렸던 그라피티(Graffiti)가 국내 미술관 전시뿐만 아니라 복합문화공간, 호텔에 벽화 형태로 걸리며 눈길을 끌고 있다. 의류 브랜드 등에서 스트리트 패션을 표방하며 그라피티를 활용하는 추세도 가속화하고 있다. 공공 미술 쪽에서도 그라피티를 차용하는 작업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여전히 거리라는 공간을 유지하고 있으나, 비주류 예술이었던 거리 미술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와 관련,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우리 사회가 거리 미술의 효용에 대해 더 많이 주목하게 됐다는 점에서 반기고 있다. 그러나 기존 문화 공간에 들어감으로써 자칫 비제도권 예술 특유의 저항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정체성 고민을 하는 상황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패션 전시회 ‘크리에이터스 그라운드’ 디렉터인 제이플로우가 작업하는 모습. 아래 사진은 부산 영무파라드 호텔 벽면을 꾸민 로열독의 벽화 ‘Walk in your shoe’. 한복을 입은 흑인 소녀로, 인종 벽을 넘어선 화해 정신을 담았다. 크리에이터스 그라운드 홈페이지 캡처 & 영무파라드 제공

◇갈수록 수용 폭 넓어지는 스트리트 아트 = 서울 홍대거리의 전시관 서드뮤지엄(3rd museum)은 오는 30일까지 조대(Jodae) 개인전 ‘염원’을 연다. 조대는 아트 집단 ‘하이픈’에 속해 있는 거리 예술가로, 그라피티와 붓글씨 요소를 융합한 것이 작품 특징이다.

조대와 함께 하이픈 집단을 꾸리고 있는 지알원(GR1)도 스트리트 아티스트로서 활동 폭을 넓혀가고 있다. 거리 예술가들의 표식인 태그 스티커 ‘지알원 왔다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시 하이픈 소속인 김홍식(HONG3)은 한국 전통 패턴과 색 이론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그라피티 아티스트다.

역시 홍대거리에서 개관을 준비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NVM은 그라피티로 내부를 꾸몄다. 국내 대표적 그라피티 아티스트인 제이플로우(Jay-Flow)와 로열독(Royyal Dog)이 벽화 작업을 통해 아트워크를 만들었고, 락카(Rocka)와 엔조(Enzo)가 동참했다. NVM은 ‘NeVer Mind’에서 따온 이름처럼 거리 문화를 실내로 들여와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맘껏 즐기게 한다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라피티 갤러리, 펍과 함께 힙합, 브레이킹 등을 게릴라성으로 공연하는 공간을 운영한다.

제이플로우와 로열독의 작품은 최근 부산 해운대에서 개관한 ‘아트호텔’ 영무파라드의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들 작품은 각기 11m가 넘는 크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국내 대표 작가 중의 한 사람인 구헌주의 ‘부산호’도 이 호텔의 벽면을 꾸미고 있다.

제이플로우는 지난 9일 서울 코엑스에서 끝난 크리에이터스 그라운드(CREATORS’ GROUND)의 디렉터를 맡아 주목을 받았다. 패션 전시회 감독을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맡은 것은 의류 브랜드에서 그라피티를 활발하게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이플로우는 에르메스, 아디다스, 리복, 지포라이터 등 의류업체들과 협업 작업을 해 왔다. 이처럼 아트 페어에서 스트리트 패션에 주목하면서 중국 의류업체들이 로열독 등 국내 아티스트들에게 협업 제안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공공미술 영역에서 거리 미술을 활용하고 있는데, 경기도가 그 중 가장 선도적이다. 경기문화재단은 5년 전에 이미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힙합을 주제로 한 그라피티 작업을 진행했다. 또 시흥시 오이도 방조제 벽면에 구헌주, 제바(XEVA)가 주민들의 삶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국내 1세대 그라피티 작가인 제바는 올해 전곡선사박물관에서 그라피티 작품 ‘Track of History’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달엔 서울 광화문에서 9m짜리 대형 벽화 작업에 동참했다. 한 주류업체가 공익 캠페인으로 진행한 이 벽화는 맑은 하늘을 꿈꾼다는 환경 메시지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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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저항 정신의 퇴색 우려 = 이처럼 거리 미술이 점점 더 주목받는 것에 대해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우리 사회도 그 효용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반기고 있다. 그라피티는 그동안 주류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탓에 각종 예술지원 혜택 대상에서 빠졌다. 그로 인해 아티스트들은 “그림을 팔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혔으나, 이제 그 활용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스트리트 아트는 특히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작품 의뢰를 받으며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비주류가 아닌 주류 문화적 코드로 번져가고 있기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적 수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리 미술이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감에 따라 그 정체성인 저항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스트리트 아트는 기본적으로 기존 제도와 상업적 자본에 저항하며 당대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정신을 표방한다. 국내에서 이런 정신의 표현은 서울 압구정과 신촌 굴다리, 그리고 부산 똥다리 등의 그라피티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다. 1990년대부터 이곳에서 활동한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관할 구청이 불법적 행위라며 단속하는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그 결과, 압구리(압구정 굴다리)의 경우엔 일정 시간에만 작업한다는 것을 전제로 구청과 아티스트들 사이에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지속가능성을 담보했다. 이처럼 기존 제도와 타협을 하더라도 당대 주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거리 미술의 정신을 지키고 싶다는 것이 아티스트들의 바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후된 마을에 벽화를 그려 미화 작업을 하는 것은, 거리 미술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시각도 있다. 그런 작업은 공공 예술 영역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 도구인 그라피티로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 연남동 벽화처럼 특정 종교 집단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홍보하기 위해 그려놓은 것들도 거리 미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아티스트들의 설명이다.

박이삭 NVM 이사는 “스트리트 아트는 비제도권에서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기존 문화에 대한 저항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며 “아티스트들의 소속도 자유로워서 래퍼, 디제이, 타투이스트, 패션 디자이너, 비보이 등과 크로스오버 작업을 많이 하게 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제도권으로 들어오더라도 자유와 저항 정신을 지키는 것이 스트리트 아트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