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어머니의 추억 속에서 만나는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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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란(1931~1983)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눈 감으면 그려지는 얼굴이 있습니다. “외할머니도 너처럼 얼굴이 하얗고 머리칼은 노르스름했다. 그 시골에서 네 외할머니처럼 하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눈동자는 네가 어렸을 때처럼 연갈색이었단다. 덩치는 왜소해도 자세는 늘 꼿꼿하셨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키우면서도 옷에 주름 하나 없으셨다. 매일 아침 쪽 찐 머리를 단장하셨는데,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보는 게 참 좋았다.”

열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외할머니를 여의었던 어머니는 늦저녁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어머니는 “한동안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외할머니가 텃밭에서 뜯어온 나물거리를 들고 ‘왜 나와 있느냐’며 대문으로 들어오실 것 같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이 시간대가 됐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던 외할아버지를 보고서야 들어가곤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머니는 늦저녁 무렵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가장 많이 꺼내십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입을 뗐다가도 이내 다시 다물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도 깊은 그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저 역시 외할머니가 무척 그리웠습니다.

철없던 중학생 시절, 학원을 빼먹고 놀다 들어온 제게 어머니가 “이야기 좀 하자”고 하셨습니다.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부모님께서 다투셨다는 동생의 귀띔이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꾸짖으실 것 같아 잔뜩 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입에서 나온 건 뜻밖에 외할머니 이야기였습니다. 외할머니가 감자전을 할 때면 고소한 냄새가 어찌나 풍기던지, 친구들과 놀다가도 홀린 듯이 집으로 뛰어들어갔다고. 흙장난하던 손으로 집어 먹을라치면 외할머니께서 손등을 탁 치고 입에 쏙 넣어주셨다고. 그럼 그걸 입에 물고 다시 놀러 나가곤 했다고. 그 맛이 그리워서 감자전을 해봐도 그때 그 맛이 도무지 나질 않는다고.

그러면서 어머니는 제게 “나는 오래오래 살 거다. 나는 자식들 일로 속상해도 터놓을 엄마가, ‘애들은 다 이렇게 크는 거다’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없다. 나는 네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줄 거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를 꾸짖는 대신 오래오래 제 편이 돼주시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엔 평생 채울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보면서 외할머니를 떠올립니다. 학교에 갓 들어간 막내 외삼촌을 비롯해 일곱의 자식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외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려봅니다.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도 저만 보면 “자식인 우리 칠 남매보다 지현이가 유독 엄마를 빼닮았어”라며 외할머니 기억을 끄집어내시는 막내 외삼촌의 마음과도 비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어둑어둑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면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외할머니 얼굴이 담긴 사진은 몇 장 안 됩니다. 아까운 마음에 칠 남매는 마음껏 꺼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세월 탓에 사진은 꺼낼 때마다 조금씩 바래 있습니다. 사진은 바랠지라도 추억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와 칠 남매의 시간 속에서 깊이를 더하는 듯합니다. 저 역시 옮겨붙은 그리움 속에서 외할머니를 추억합니다.

외손녀 권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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