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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Leadership 게재 일자 : 2020년 09월 21일(月)
‘히데나가式 2인자 처세’ 벗고…‘히데요시式 1인자 본색’ 드러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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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신임총리 스가 요시히데

흙수저 출신 ‘아베 내각 2인자’로 최장 재임후 1인자 등극… 냉정·치밀하고 현실 문제점 파악에 능숙
중요한 순간 존재감 드러내 … 새 내각 곳곳에 ‘히든카드’ 배치 자기정치 향한 야심 표출도


“예전에는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동생)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히데요시를 지향한다.”

제99대 일본 총리로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공식화한 직후 지방 당원들과의 온라인 회의에서 꺼낸 말이다. 1987년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橫浜)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하던 때 “히데나가처럼 언제나 뒤에서 지켜주는 존재가 있었기에 (히데요시가) 천하를 잡을(통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면서 히데나가를 다룬 책 ‘도요토미 히데나가-어느 보좌역의 생애’를 언급한 이후 스가 총리의 롤모델은 히데나가로 통해 왔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급작스러운 사임 이후 압도적 지지를 얻어내며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20일간 그의 행보를 보면 스가를 단순히 ‘아베의 보좌역’으로만 읽어낼 수는 없을 듯하다. 대외적으로 “파벌은 끝났다”고 주장하면서도 당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파벌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내각을 아베의 사람들로 채운 듯하면서도 자기 정치를 위한 ‘히든카드’를 심어두는 등 그간 ‘2인자’ 이미지 뒤에 숨겨 온 그의 야심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다가(도광양회·韜光養晦)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한다(유소작위·有所作爲)’는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외교 전략이 연상된다.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차기 지도자들에게 전수한 이후 중국 외교정책의 바이블로 자리 잡은 ‘28자 방침’에 착안해 스가 총리의 리더십 스타일을 가늠해본다.

◆냉정관찰(冷靜觀察)·침착응부(沈着應付)로 아베 정권 최대 공신=스가 총리는 제2차 아베 내각 출범과 동시에 내각 2인자인 관방장관에 임명돼 아베 전 총리가 퇴임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정부의 대변인으로서 휴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오후 두 차례 기자회견에 나선 그는 당 총재 선거가 치러졌던 지난 14일 3213번째 회견에 나서면서 ‘관방장관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몇 번이나 있었다”고 답했다. 주변국들과의 외교 문제부터 가장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이르기까지 그는 8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민감한 현안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붙은 별명은 ‘철벽’ ‘웃지 않는 관방장관’ ‘최강 참모’ ‘그림자 총리’ 등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냉정히 관찰하는’ 자세로 ‘침착하게 대응하며’ 아베 정권의 수명을 늘린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의 냉철한 상황 파악 능력은 정치초년병 때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1975년 오코노기 히코사부로(小此木彦三郞) 중의원 의원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일본 정계에서 ‘거리 연설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스가 총리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주고 관심사에 동그라미를 쳐달라고 부탁했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관계자 몇 명이 복사본을 부탁하러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통신비 인하와 같은 포퓰리즘(대중영합적) 정책을 펴고 ‘흙수저’ 출신임을 강조했던 훗날 그의 모습이 여기에 기원을 둔다는 평가가 있다.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 도쿄(東京)대 명예교수는 “지역 현장을 알고 있는 인물로, 현실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굉장히 능숙하다”고 평했다.

▲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출범과 동시에 관방장관에 올라 역대 최장기간 재임한 스가 요시히데(앞줄 가운데) 신임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제99대 총리로 취임한 뒤 총리 관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각료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AP연합뉴스

◆‘도광양회’ 통해 1인자 등극=고향을 떠나 사립 명문대 중 등록금이 가장 저렴하다는 호세이(法政)대에 진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가 총리는 불현듯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라는 생각에 무작정 대학 내 진로센터를 찾았다. “이 학교를 졸업한 정치인들 좀 알려달라”는 요청에 센터는 그를 대학 동문회 사무국장에게 소개한다. 스가 총리는 이 인연을 계기로 27세의 나이에 오코노기 의원의 비서로 취직했다. 스가 총리는 이때를 자신의 생애 중 처음 맞이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는다. 오코노기는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에서 통상산업상(현 경제산업상)이 되자 스가를 비서관으로 들여 중요한 일정에 동석시켰다. 그렇게 11년간 내공을 쌓은 그는 39세가 되던 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요코하마시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스가 총리가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한 때는 그의 나이 48세던 1996년이었다. 가문의 후광을 업고 이른 나이부터 정치 무대에 노출돼 온 유력 정치인들과는 대비된다. 자신의 실력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조력자로서 실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는 일의 반복이 그의 정치인생이었던 것이다.

◆때 되면 나서는 ‘유소작위’=스가 총리가 나카타초(永田町·일본 정치의 중심지)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사건은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그가 소속돼 있던 헤이세이(平成) 연구회(지금의 다케시타파)의 수장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1937∼2000)가 아닌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1926∼2000) 전 관방장관을 지지하며 파벌과의 이별을 선언했던 때였다. 닛케이아시안리뷰는 이를 두고 “정치 신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란이었다”고 평가했지만, 스가 총리는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모두가 나를 걱정하는 것이 이상했다”고 돌이켰다. 여기서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밀어붙이고, 중요한 순간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학창 시절에도 그는 얌전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할 말은 했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한번 결정한 것은 관철하는 면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야구부에서 활동하던 중학교 때 “타격 자세를 바꿔보라”는 감독의 제안에도 “이쪽이 타이밍 잡기가 쉽다”며 3년간 한 가지 폼을 고수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관방장관 시절엔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을 실현하고 성과를 내는 데 집착하며 이에 반기를 드는 관료는 즉각 경질했다. 관저 주도 정치를 확립하기 위해 2014년 5월엔 내각인사국을 만들었고, 총리가 되고 나선 초대 내각인사국장을 지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를 관방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손타쿠(忖度)’ 기반 행정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취임 직후 “1년 내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단행하겠다”고 못 박은 데서는 타이밍을 보며 신중한 입장을 거듭해오다 결정적인 순간에 장기 집권 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유소작위’적 면모의 절정이 엿보인다.

◆‘절부당두(絶不當頭)’의 한계 맞을까=‘아베 계승’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없었다면 그의 당선은 과연 가능했을까. ‘아베의 영원한 2인자’ 프레임에서 탈피하는 것은 스가 총리가 퇴임할 때까지의 숙제다. 그의 뒤에는 ‘아베 시즌2’ ‘아베 아류’ 등의 수식어가 즐비하며, 실용주의를 지향하고 중립·온건적 이미지를 구축해온 탓에 아베 전 총리만큼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절대 우두머리가 되지 않는(절부당두)’ 그의 생존 방식이 되레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무(無)파벌’ 총리의 대명사가 됐지만, 사실상 파벌의 옹립이 없었다면 그의 집권은 불가능했기에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자기 정치를 펴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무엇보다 주변국 대비 악화일로를 걷는 코로나19 상황을 해결해야 하며 중국·한국 등 주변국과의 경색돼 있는 관계 개선도 숙제로 남아 있다.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 교수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은 현실주의적 관점에선 견실하지만, 시야가 좁기 마련”이라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해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할 수 있다”고 짚었다.

장서우 기자


■ 스가 요시히데 일본 신임 총리 약력

△1948년12월 아키타현 출생
△1973년호세이대 법학부 졸업

△1975년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중의원 비서
△1984년히코사부로 통산상 비서관
△1987년요코하마시 시의원(2선)
△1996년중의원 의원 첫 당선
△2002년고이즈미 내각 국토교통상·경제산업상 정무관
△2006년제1차 아베 내각 총무상
△2007년자민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국장
△2011년자민당 조직운동본부장

△2012년자민당 간사장 대행, 제2차 아베 내각 관방장관
△2020년9월 제26대 자민당 총재 겸 제99대 총리


▲  오코노기 히코사부로,가지야마 세이로쿠, 야마구치 나쓰오, 이병기 (왼쪽부터)

■ 스가 총리의 인맥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전 통상산업상과 아들 하치로 국가공안·방재상

스가 총리는 요코하마(橫濱)를 지역구로 뒀던 오코노기 히코사부로(小此木彦三郞) 전 통상산업상의 비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인 마리코(眞理子) 여사도 당시 동료 비서의 언니가 소개해줬다. 비서 경력은 스가 총리의 정치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는데, 1987년 요코하마의 시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는 1991년 타계한 오코노기 전 통상산업상의 후계자라는 이미지가 붙었다. 훗날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을 유치해 화제가 됐던 다카히데 노부히로(高秀秀信) 당시 요코하마 시장까지도 1990년대 초반 당시 2선 시의원에 불과했던 스가 총리에게 인사 문제를 논의할 정도로 의지했는데, 이는 사후에도 요코하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코노기 전 통상산업상의 후광과 비서 시절 구축해놓은 폭넓은 인맥 덕분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당시 요코하마 시의 시정을 장악했던 스가 총리는 ‘요코하마의 그림자 시장’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스가 총리의 총재선거 대책본부장을 맡았고 신임 국가공안·방재상 자리에 오른 오코노기 하치로(小此木八郞)가 오코노기 전 통상산업상의 아들로 스가 정부에서 향후 중용될 것으로 보인다.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 관방장관, 경제산업상

스가 총리는 2013년 관방장관에 취임하자 바로 찾은 곳이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의 묘소일 정도로 가지야마 전 장관을 정치적 스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고 있다. 현재는 무파벌인 그가 한때 몸담았던 다케시다파(헤이세이(平成) 연구회)를 나간 이유도 지난 1998년 총재 선출에서 당시 회장이었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대신 가지야마 전 장관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가지야마 전 장관이 “관료는 자신들의 생각이 있어 정치인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반드시 자신들의 생각을 넣어 말한다. 어쩐지 자네는 금방 속아 넘어간다”고 조언하자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교우관계를 쌓기 시작했다고 스가 총리는 밝힌 바 있다. 가지야마 전 장관이 강력한 일본헌법 9조(평화헌법) 수호주의자였고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론자였던 부분도 스가 총리가 상당 부분 이어받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의 장남인 가지야마 히로시(梶山弘志) 현 경제산업상과도 이 때문에 오랜 안면과 유대관계가 있다.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와 창가 학회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와 창가 학회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은 불교 종파 ‘창가학회(創價學會)’를 모태로 하고 있고,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현 대표 또한 독실한 창가학회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창가학회 수뇌부와 깊숙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가 총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와 야마구치 대표가 대립할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해왔고 그때마다 큰 성과를 거뒀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2015년 공명당이 연정 조건으로 걸었던 소비 경감세율에 관련된 것으로 아베 전 총리와 아소 다로(麻生太朗) 당시 재무장관,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당시 간사장이 모두 부정적이었지만 당시 관방장관이던 스가 총리는 “참의원 선거 때 공명당 없이 이길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이들을 설득, 연정을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심지어 선거 당시 자민당의 반대에도 공명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적도 있다. 스가 총리는 지난해 참의원 선거 때 히로시마(廣島) 지역에서 정치 신인인 가와이 안리(河井杏里)가 중진인 미조테 겐세이(溝手顯正) 참의원 회장을 제치고 당선되는 데 공헌했다.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주일 한국대사 시절부터 스가 총리와 친분을 쌓았고, 재임 기간 스가 총리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만나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정도의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서로 문자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으며, 항상 한국 관계자들과 대화를 할 땐 이 전 실장의 안부를 물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일각에선 박근혜 정부 때 있었던 2015년 위안부 합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성사시킨 게 당시 국가정보원장이었던 이 전 실장과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총리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합의는 백지화됐고, 스가 장관이 한국 정부에 크게 실망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이 전 실장이 지난해까지 2년간 수감된 기간에는 스가 총리가 직접 위로의 메시지도 보낸낼 만큼 신뢰 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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