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높은 벼슬은 우연일 뿐이라오’… 500년전 名文을 곱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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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백승종 지음│김영사

“오라, 청춘은 다시 오지 못하리니／ 늙음이 온다 한들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높은 벼슬자리는 우연일 뿐이라오／ 부귀는 본디 뜬구름과 같은 것／ 군자에게 오직 소중한 것은 의리뿐.”

고려 말 신진사대부 정도전이 지은 한시 ‘강지수사(江之水辭)’의 한 대목이다. 봄날에 벗들과 꽃구경을 즐긴 감흥을 노래한 시이지만, ‘의리’라는 표현에 주목하면 다른 숨은 뜻이 드러난다. 정도전에게 의리는 그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아니었다. 시비를 가려 옳은 일에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것이 의리였다. 정도전은 부패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이 곧 백성을 위한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는 와중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역성혁명에 대한 꿈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가 쓴 이 책은 15∼19세기 조선의 문예사를 높다란 경지로 끌어올린 명문장을 살핀다. 때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고, 때로는 고난을 자초했던 문장들이다.

정도전이 “혼란의 시대가 배출한 명문장가”였다면, 세종의 총애를 받은 박팽년은 “실용적 글쓰기의 달인”이었다. 세종은 단정한 품행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명황계금’을 편찬할 당시 집현전의 허다한 학자들을 제쳐놓고 박팽년에게 책의 서문을 맡겼다. 명황계금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스캔들을 논평한 책이다. 서문에서 박팽년은 “평화가 오래 이어지자 현종은 사치를 좋아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양귀비에게 홀려 방탕한 세월을 보냈다. 털끝만 한 차이가 천 리로 벌어진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일을 가리킨 것”이라고 일갈했다.

추상처럼 매서운 문장을 남긴 글쟁이도 많았다. 광해군 3년, 한 선비가 과거 시험 답안지에 조정을 비판하는 글을 잔뜩 써낸 적이 있었다. 발칵 뒤집힌 조정이 시험 자체를 취소해버리자 시인 권필이 풍자시를 지어 올렸다. “성안 가득 메운 신사님들 봄빛에 아첨하기 바쁘다오／ (중략) 뉘라서 알았을까, 바른 말씀 한갓 포의(초야의 선비)에게서 나올 줄을.” 권필은 “시대를 외면하지 못한” 문재(文材) 때문에 매를 맞고 숨졌다.

저자는 “조선 역사에서 세종 재위 시기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고 말한다. 어느 왕보다 문장가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재능 있는 선비를 선발해 공부를 면제해주고 글짓기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를 시행했다. 왕의 이런 관심 덕분에 박팽년 외에도 권채·남수문·신숙주·하위지 등 빼어난 문장가가 대거 배출됐다.

500년 전의 글을 읽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안겨줄까. 저자는 말한다. 옛 시대의 명문에서 우리가 나아갈 미래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정보는 넘치지만 이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이 부재한 상황을 ‘문장 공부’로 극복할 수 있다고. 260쪽, 1만48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