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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20년 10월 16일(金)
황톳빛 폭풍·세 줄기 빛기둥… 마음에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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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화가의 1989년 작 ‘폭풍의 바다’.

▲  리경 작가의 설치 작품 ‘more light’.

‘시대의 빛과 바람’ ‘천 개의 바람’.

가을의 절정에서 두 화랑의 전시 타이틀에 담긴 바람이 특별하게 오감을 자극한다. 앞은 제주 출신 거장 화가인 고 변시지(1926∼2013)의 개인전이고, 뒤는 유럽과 남미 등에서 크게 인정받은 설치 작가 리경(51)의 작품전이다. 국내 대표적 화랑인 가나아트는 변시지전(10월 16일∼11월 15일)을 열며 “이제부터 제대로 조명받을 필요가 있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예화랑은 리경전(10월 12일∼11월 7일)에 대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를 미술 애호가들이 더 많이 알았으면 해서”라고 했다. 두 작가는 창작 활동 시기뿐만 아니라 장르와 작품 세계가 전혀 다르지만, 마음에 부는 폭풍을 자신만의 빛으로 담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같다. 자연 속에서 늘 만나는 바람이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인간의 심상을 표현하며,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 변시지 ‘시대의 빛과 바람’展

제주의 풍토, 화폭에 담아…조랑말 등 그린 40점 선봬


변시지(사진) 작품들은 황톳빛 노란색으로 출렁거린다. 1975년 제주로 귀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석양에 물든 바다와 대지를 내려봤을 때 황홀하게 만났던 바로 그 빛이다. 변시지는 이 황톳빛을 바탕으로 삼아 동서양의 화법을 융합한 자신만의 화풍을 일궈냈다. 서양화 속에 동양 수묵화의 검은 먹선을 들이는 기법을 시도했고, 제주의 풍토를 그림에 반영하며 그것이 지역 정서를 넘어 보편적으로 인간 본연의 고독을 어루만져주기를 소망했다.

생전에 스스로 언급했듯, 변시지의 작품 세계는 세 시기로 나뉜다. 일본(1931∼1957), 서울(1957∼1975), 제주(1975∼2013) 시절 등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6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소학교 때 씨름대회에서 다리를 다친 후 운동을 못 하게 되자 그림에 빠졌다. 스승 데라우치 만지로 밑에서 사실주의 기법과 후기 인상파 표현 요소를 익혔고, 23세 때 일본 최고 권위 미술전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서울대 초청으로 32세 때 귀국한 그는 창덕궁 비원 등을 밝고 섬세한 푸른빛으로 담아내며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했다. “민족적인 기반 위에 나의 예술을 세워야 하겠다”는 게 그의 다짐이었다.

서양화가로서 한국미를 찾아 나섰던 그는 제주에서 38년을 살며 황톳빛의 진화를 통해 변시지풍을 이뤄냈다. 이번 전시는 제주 시절의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제주를 상징하는 조랑말과 함께 돛단배, 초가, 소나무, 외발 까마귀, 소년과 지팡이를 짚은 노인 등이 등장한다. 그들은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풍경 속에 외롭게 존재하는 모습이다.

작가의 아들로, 이번 전시를 가나아트와 공동 주관한 재단법인 아트시지 대표인 변정훈 씨는 “바람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마음의 바람일 것”이라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려는 모습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소재”라고 해석했다. 변시지를 연구해 온 송정희 공간누보 대표도 “고독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놓지 않은 작가의 심상에 부는 바람”이라고 했다.

이 바람은 어릴 적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소외감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던 신체 장애, 고향 제주의 아픈 역사도 마음에 폭풍을 일으켰을 것이다. 변시지의 작품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생애에 끊임없이 부는 바람을 탓하지 않고 화업(畵業)을 이루는 구도의 동반자로 삼았던 거로구나.


■ 리경 ‘천 개의 바람’展

공간에 빛연출 작품으로 주목… 삼원색 담아 오브제로 형상화


“대형 작업을 주로 하다 보니까, 기금을 받는 뮤지엄 전시회에 익숙해요. 상대적으로 좁은 갤러리 공간에서 작업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결과가 잘 나온 듯합니다. 지금까지 한 설치 작업을 응축해 담고자 했어요.”

리경(사진) 작가는 작업하는 것보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게 더 힘들다며 웃었다. 그는 ‘천 개의 바람’이 이번 작품 모두를 포괄하는 제목이라고 했다. 물리적으로는 셀 수 없는 바람을 예술을 통해 헤아린다는 것.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의 작업과 맥락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리경은 텅빈 공간에 빛을 연출하는 작품으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가 유학한 영국 런던을 비롯해 독일, 슬로베니아, 브라질, 일본, 인도의 각 도시에서 초대받아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전시관에서는 백남준의 설치작 ‘거북’을 빛으로 감싸는 컬래버레이션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이번 전시 역시 빛의 구성을 중심으로 하지만, 조각과 회화 등이 함께 어우러진다. 화랑 1층에는 빛기둥과 함께 좌대 위에 3개의 상자가 있다.

빛의 삼원색을 담아 오브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2층 벽면은 빛으로 가상 계단을 만들었다. 3층은 자개로 만든 정방형 오브제들이 벽에 걸려 있다. “빛을 다루는 작가로서 자연광과 맞짱뜬다는 각오로 자개가 해를 받아서 변하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리경은 이번 전시의 핵심인 세 개의 빛기둥을 소개하다가 느닷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2년 반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인 까닭이다. 세 개의 빛줄기는 인생의 주기를 뜻한다. 저마다 다른 주기로 켜지고 꺼지는데, 하나로도 빛나지만 같이 어울려서 더 환해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딸이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18년 동안 서로 보지 않고 지냈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이 제 작품을 보여드리니까 고개를 끄덕거리셨다더군요. 그때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그는 인생에서나, 작품에서나 타협을 통한 소통을 중히 여기게 됐다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그의 마음 숲에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불었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예술적 욕망이 앞으로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 또 그 바람의 모양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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