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고질적 부패·野탄압·코로나… ‘태국의 성역’ 왕실까지 겨누게 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 지난 19일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이번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세 손가락 경례는 2012년 개봉한 영화 ‘헝거 게임’에 등장한 표식으로, 태국 내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의 의미로 빈번히 사용돼왔다. 16일 물대포를 동원해 집회를 강제 해산하려는 경찰에 맞서 한 참가자가 같은 모양의 경례를 해 보이고 있다. 이달 14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시위가 5일째 되던 날인 18일 반정부 세력을 지지하는 한 승려는 시위가 한창이던 방콕의 한 교차로에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정부)의 홍보 전략에 눈멀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었다. 같은 날 시위대가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켜고 일제히 방콕의 승전기념비 앞에 군집해 있다. EPA AP 연합뉴스

- 계층갈등서 세대갈등으로… 태국 反정부 시위 배경·전망

내각 부패 스캔들·경제난 속
야당 해산·레드불 뺑소니 등
젊은층 분노하며 시위 이어져

‘왕의 권위’통하지 않는 세대
왕실에 대한 고강도 개혁 요구
국왕 ‘조정 역할’ 기대 못하고
조기총선 치를 가능성도 희박

석 달째 이어지고 있는 태국의 반정부 시위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부패한 정부가 물러날 가능성이 작고, 권위를 잃은 국왕과 군부의 결탁 의혹,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인한 타격이 겹치면서 분노한 태국 젊은이들의 시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시위를 이끌던 ‘자유청년’의 파누사야 시티지라와타나쿨이 경찰에 체포되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태국 시위대들의 분노가 커지는 상황이다. 정부의 강경 진압 경고에도 매일 수많은 젊은이가 시위에 나서고 있고, 단순한 정권 퇴진과 반정부 지도자의 석방을 넘어 그동안 ‘성역’이었던 왕실 개혁까지 요구하고 있다.

◇계층 간 갈등에서 세대 간 갈등으로, 왕실까지 공격 = 21일 밤 태국 방콕의 BTS전철역 등지에선 수만 명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태국 정부가 지난 15일 ‘5인 이상의 정치집회 금지’를 포함한 비상 포고령을 발령하고 물대포를 동원한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이후에도 6일 연속 도심지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들은 현장에 모여 △주택 문제 해결 △시위대 협박 중단 △헌법 개정의 3대 요구안을 상징하는 손가락 세 개를 높이 들고 “개혁할 것인가 붕괴될 것인가”라며 정부를 비난했다.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다음 주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시위를 잠재우긴 어려워 보인다.

이번 시위는 계층·지역 간 갈등이 컸던 ‘레드셔츠 시위’와는 달리 세대적 격차가 두드러진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왕실과 정부에 대한 인식차가 최근 적극적인 시위 참가자와 소극적 방관자 및 반대자들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시위의 ‘전신’으로 평가되는 지난 2월 대학가 캠퍼스 플래시몹 시위의 주 계층은 학생과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시위에서는 SNS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15일 정부가 집회 장소를 긴급 봉쇄하자 시위를 이끌던 자유청년과 탐마삿과시위연합전선(UFTD)은 SNS를 통해 집결 장소를 랏차쁘라송 교차로로 공지해 게릴라 시위를 진행했다.

특히 시위 주도세력의 연령이 젊은 층으로 낮아지면서 그동안 금기시돼온 왕실에 대한 강도 높은 개혁 요구가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자유청년은 △왕의 비위에 대한 의회의 수사권 부여 △왕실 비판죄 폐지 △왕실자산과 국왕 재산의 분리 및 모든 왕실 재산 감시 △군주제 미화 교육 및 홍보 중단 △국왕의 쿠데타 지지 중단 등을 요구했다. 태국에선 지난 1925년 입헌군주제 성립 이후 20여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를 지지·비판하는 수많은 반정부 시위가 열렸지만 국왕과 왕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태국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정환승 한국외대 교수는 “13세기 수코타이왕조 시절부터 태국 국왕은 불교적 윤리관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법왕’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로 인해 신의 대리인이라는 권위를 얻었다”며 “이전 세대에는 왕의 권위가 통용됐지만 젊은 세대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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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P 해산·코로나19·레드불 뺑소니사건 3대 기폭제 = 태국 반정부 시위가 격화된 데는 내각 관료의 부패 스캔들과 나아지지 않는 경제난, 군인 총기난사 사건 등이 발생해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올해 초 발생한 세 가지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첫 번째는 지난 2월 태국의 제2 야당인 퓨처포워드당(FFP)이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으로 와해된 것. 당시 정부는 당 대표였던 타나톤 쯩룽르앙낏이 자신의 돈을 당에 빌려준 것은 대출이 아니라 후원금이며 이는 법정 최고후원금을 초과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고, 헌재는 정부 손을 들어줬다. FFP는 기존에 귀족-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던 현 여권인 빨랑프라차랏당과 지방-서민 지지를 받던 탁신계 푸어타이당 간의 양당제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층과 청년층의 지지를 받았고, 지난 총선에선 81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 전 세계로 확산한 코로나19는 태국 경제에 직격탄이 됐다. 각국의 봉쇄조치 및 이동제한령 등으로 태국 경제의 10%를 차지하고 인구의 20%가 종사하고 있던 관광산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됐다. 태국 국가경제사회개발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지난 4월까지 4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연말까지 총 1400만 명의 실업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태국 정부가 세계적인 음료회사 ‘레드불(Red Bull)’ 창업주의 손자인 오라윳 유위티야가 낸 뺑소니 사망사건에 대해 불기소를 결정한 것은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오라윳은 지난 2012년 9월 방콕 시내에서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 중인 경찰을 치어 숨지게 한 뒤 달아났고, 이후 혈중알코올농도가 0.065%로 법적 운전 허용치를 초과했지만 경찰은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오라윳은 해외에서 포뮬러1(F1) 경기 관람이나 요트 여행 등을 하며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사당국의 증거 조작 정황들이 인터넷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태국 국민의 분노가 절정에 달했다.

◇국왕·군부 공생관계 필수, 조정 가능성 희박 = 과거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전 국왕은 국정 혼란 때마다 개입해 정권에 의회 해산 후 재선거를 요구하는 등 ‘조정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현 국왕에겐 이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더 문제다. 종교적이고 엄격한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됐던 부왕과 달리 왕자 시절 이혼만 세 차례 할 정도로 방탕한 사생활과 부인들에 대한 학대 의혹, 잦은 외유와 외교적 결례 등을 범하며 물의를 빚어온 현 국왕은 국민 및 정치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라마 10세는 코로나19가 창궐할 당시 태국을 떠나 현재까지도 독일 바이에른주 알프스의 리조트에서 20여 명의 여성 수행원과 함께 지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네 번째 결혼과 함께 1925년 이래 처음으로 ‘후궁’(왕의 배우자)을 임명했다가 1년도 안 돼 후궁의 폐위·복위를 반복해 왕실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왕자 시절 후계자 자리가 흔들렸는데도 마하 국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쁘라윳 현 정권 및 군부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던 만큼, 현 국왕이 쁘라윳 현 정권의 퇴진을 종용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국민적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쁘라윳 정권이 의회 해산 후 조기 총선을 단행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총리와 빨랑프라차랏당은 지난해 총선에선 선거법을 개정해가며 푸어타이당 견제에 나섰는데도 선거에서 패했다. 당시 군부가 전원 지명하는 상원의원들의 도움으로 과반을 차지해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FFP 같은 제2의 반대세력까지 탄생했다. 조기 총선을 치른다면 재집권을 장담할 수 없다.

박준우 기자 jwrepublic@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