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김사장의 요즘 소설>현실에 지친 당신, 퇴근길 비현실 세계로 들어선다면 …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멸망의 정원

회사에 가기 싫다. 오늘은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는데 내일도 그럴 것 같다. 업무는 끝이 없어서 집에 돌아오면 늘 피곤하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이제 됐어, 더 이상은 못해,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퇴근하던 중 그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지하철역을 착각해 잘못 내리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지? 얼핏 평범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그곳이 이계(異界)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작은 일도 서로 돕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반한 회사원 세이치가 직장도, 아내도 잊어버린 채 그 세계에 눌러앉아 결혼까지 한다는 것이 소설의 도입부이다. 이계의 시장 이야기 ‘야시’(노블마인)로 꿈에서 본 것 같은 그리운 느낌이 드는 장소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선보인 바 있는 작가 쓰네카와 고타로는, 여러 작품에서 비슷한 설정을 변주하며 호러 팬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이번에는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 생명체를 막기 위해 평범한 중학생이 분연히 떨쳐 일어선다는 판타지 학원물적 전개가 눈길을 끈다.

2020년 1월 19일, 별안간 하늘에서 출현해 세계 곳곳에 떨어진 유기물 ‘푸니’는 마치 신종 바이러스처럼 인류를 급속히 감염시키며 점차 증식해간다. 이때 푸니에 대한 저항치가 높은 사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푸니를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같은 반 남학생에게 고백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학생 세이코는, 전국에서 푸니에 대한 저항치가 가장 높은 인간으로 판명돼 국가 주도의 태스크포스팀에 합류한다. 흡사 교복을 입은 채로 우주로 나가 싸우는 ‘별의 목소리’ 속 히로인을 연상시키는 세이코는, 엄청난 양의 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푸니를 완전 소멸하기 위해서는 이계를 멸망시켜야 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이계에 거주하는 회사원 세이치뿐임을 깨닫는다.

비로소 전말을 알게 된 세이치는 자신의 행복과 지구(아내를 비롯한 가족 및 친구들)의 안녕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나. ‘멸망의 정원’(비채)은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 외에도, 사도로 명명된 존재가 무차별적으로 지구를 공격하는 ‘에반게리온’이라든가 여자친구가 지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등장하는 ‘최종병기 그녀’ 같은 작품들을 레퍼런스로 삼아 성립됐다. 이 때문에 “평범한 인물 사이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항을 두지 않고 세계의 위기나 지구 멸망과 직결된다”는 설정에 익숙하지 않은 당신은 지금 이 글을 마주하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네” 하고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코웃음 치는 와중에도 ‘아아 내일은 회사 가기 싫은데’라고 생각했다면 ‘멸망의 정원’을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왜냐면 이것은 지친 직장인을 위한 소설이니까.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