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은 0.6초만에 떠난다”… 1.5류 디자인을 1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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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디자인 승부수’ 재조명

2005년 ‘밀라노 선언’서 강조
삼성 브랜드 위상 향상 기폭제

“고객은 0.6초 만에 떠난다.”

지난 2005년 4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주요 사장단을 불러모았다. 이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은 아직도 1.5류”라면서 “진열대에서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짧은 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마케팅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면서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주문했다. 바로 삼성 디자인의 변곡점을 만든 ‘밀라노 선언’이다.

이 회장은 1993년 삼성 체질을 뜯어고친 ‘신경영 선언’이후 디자인을 새로운 경영 화두로 잡았다. 이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21세기 기업 최후의 승부처는 디자인”이라면서 ‘디자인 혁명의 원년’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삼성 제품이 기술력을 인정받고도 ‘삼류’ 취급을 당하는 원인으로 디자인을 지목했다.

이 회장의 디자인 철학은 삼성 제품 생산 전 과정을 바꿨다. 삼성은 밀라노 선언 이전에는 가볍고 단단한 제품을 만드는 데 치중했다. 이후 디자인적 사고가 제품 개발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시장 동향과 소비자 수요를 체계적으로 조사했고 사용자 입장에서 제품을 디자인했다.

대표적 사례가 2006년 3월 내놓은 ‘보르도 TV’다. “TV는 사각형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출시 16개월 만에 500만 대가 팔렸다. 보르도 TV가 평판 TV 시장에서 새로운 기준점이 되자 경쟁사들은 유사제품을 내놓기 바빴다. 이를 발판으로 삼성전자는 소니를 제치고 세계 TV 1위로 도약했다. 14년 연속 글로벌 TV 시장 1위 신화는 디자인에서 출발한 것이다.

후발주자였던 삼성 휴대전화의 투박한 외관도 달라졌다. 2002년 조약돌을 닮은 ‘이건희폰’에 이어 벤츠폰(2003년), 블루블랙폰(2004년), 햅틱폰(2009년) 등으로 글로벌 1위를 위한 발판을 다졌다. 피처폰 7개가 텐밀리언셀러(1000만 대 이상 팔린 제품)의 반열에 줄줄이 오르면서 당시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를 따라잡을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디자인에 대한 오너의 관심은 삼성의 제품 경쟁력을 단숨에 높이는 동력이 됐다”며 “삼성 브랜드의 위상이 프리미엄으로 높아질 수 있었던 기폭제가 이 회장의 디자인 혁명”이라고 말했다.

디자인으로 인한 성과는 숫자로 입증됐다. 북미와 유럽 주요 매장 진열대 맨 앞줄을 소니와 노키아, 파나소닉 등이 아닌 삼성 제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는 실적으로 직결됐다. 2000년대 중반 80조 원대에서 주춤하던 삼성전자의 연매출은 2008년 100조 원, 2012년 200조 원대를 돌파했다. 디자인 연구조직은 20년 넘게 보강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조직을 갖고 있다. 1971년 단 1명에 불과했던 디자이너는 현재 1500명이 넘는다. 미국, 영국, 일본, 중국, 인도 등 7개국에 글로벌 디자인연구소를 두고 있다.

권도경 기자 kw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