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공주·요정… 홍일점 여주인공의 왜곡된 性역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달의 요정 세일러 문’

■ 요술봉과 분홍제복│사이토 미나코 지음│권서경 옮김│문학동네

‘요술공주 샐리’‘세일러 문’
일본 애니메이션 집중 분석

여주인공은 요술소녀이거나
왕자에 의존하는 ‘신데렐라’

위인전도 정숙함 돋보이며
남자에 인정받는 여성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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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은 여자(남자)고, 나머지 절반은 남자(여자)다. 인류 역사 이래 이 공식 아닌 공식은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세상을 주무른 건 늘 남자였고, 영화나 TV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각종 매체의 주인공도 대개 남자였다. 물론 여자가 없지 않았으니 홍일점(紅一點)이라 칭한 이들이 있었다. 일본의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의 ‘요술봉과 분홍 제복’은 홍일점으로 읽어낸 여성 차별의 사회사(社會史)다.

저자는 일본 애니메이션 초창기를 ‘소년 왕국’과 ‘소녀 왕국’으로 구분한다. 소년 왕국은 대체로 히어로물이고, 소녀 왕국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요술공주 샐리’ ‘달의 요정 세일러 문’ 등 마법을 부리는 소녀가 주인공인 ‘마법소녀물’이다. 둘 다 세상을 구하는 역할이지만, 그 자체로 강한 힘을 가진 히어로 소년들과 달리, 소녀들은 “마법의 힘으로 변신”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통을 잇는다고도 할 수 있다.

소년 왕국과 소녀 왕국은 이내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소년 왕국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했다. 침략해오는 적국을 향해 소년 주인공들은 “평화를 지키려는 목표로 방어전”을 치른다. 소년 주인공들은 과학기술에 의해 탄생한 존재들로 미래 전쟁을 대비한다. ‘마징가 Z’ ‘우주소년 아톰’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반면 소녀 왕국의 주인공들은 지구보다는 “사람들의 꿈을 심어주는 것”이나 “사랑의 힘을 모으는 것”이 목표다. 적국을 섬멸하기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일에 매진한다. 악당들이 세일러 문의 ‘환상의 은수정(크리스털)’을 뺏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 기억하시는가.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의상은 곧 연애지상주의로 이어지고, 스스로 큰 힘이 있으면서도 왕자님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허구 세계인 애니메이션 왕국은 판타지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실화의 세계인 ‘위인전 왕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핵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위인 이야기는 사실상 “전설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국정교과서에는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운 일화와 에드워드 제너가 자기 자식을 우두접종 실험에 이용했다는 미담”이 버젓이 실려 있었다. 이 같은 위인의 세계를 소년 왕국이 그대로 답습했다. 여성 위인전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독특한 특색이 있다. 남초사회에서 성공한 ‘붉은 전사’(잔 다르크), ‘사람들을 구원하는 성모’(나이팅게일), ‘영원한 마법소녀’(헬렌 켈러) 등이 부각된 것이다. 전후에는 백인 여성, 모범생, 정숙함 등의 이미지가 더해져 남성 권력자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소년·소녀 주인공들을 ‘팀’으로 엮은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독수리 오형제’다. 저자는 ‘독수리 오형제’가 “소년 왕국의 정석을 보여준 정극 과학소설(SF)이자 최초로 단체전 시스템을 완성”했다고 평가한다. 1980년대 들어서는 홍이점(紅二點)이 단골이 됐고, 그 기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 멤버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5년. 그렇지만 “남성 팀의 자랑스러운 홍일점 대원은 언제부터인지 팬티 노출로 먹고사는 성노동 전사로 전락”했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후반부에 여러 위인과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유사성을 설명한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을 ‘나우시카’에, 퀴리 부인은 ‘세일러 문’에, 헬렌 켈러는 ‘모노노케 히메’에 접목한다. 아쉽게도 둘 사이의 연관성을 깊이 설명하기보다 위인의 삶에 집중하며, 이러이러한 요소들이 비슷하다는 정도로만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매체가 소모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과 생각이 이끌려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일이다. 저자가 책 말미에 “남자가 전부인 집단, 남자 여러 명과 여자 한 명인 집단, 성비가 반반인 집단, 여자 여러 명과 남자 한 명인 집단, 여자가 전부인 집단 … 다양한 성비를 이루는 조직이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홍일점이 그 본래의 의미, 즉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피어난 붉은 꽃 한 송이”, 즉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의미를 되찾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380쪽, 1만7000원.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