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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M 인터뷰 게재 일자 : 2020년 10월 30일(金)
따릉이 타고 왕진가는 ‘동네 주치의’…“목욕탕·술집서 상담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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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은평구 구산동 길거리에서 왕진 가방을 실은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낙중 기자

■ 비영리 의료복지협동조합 ‘살림의원’ 운영 추혜인 원장

이웃 초등생·복덕방 아저씨 등
마을 중심 의료 지향 교류 활발
“관계·사람의 힘으로 환자 케어
삶의 맥락 속 통합적 진료해야”

주민들이 투자해 ‘조합’ 만들어
주인으로 대우받으며 치료받아
“사회적 약자들 맘편히 진료받을
여성주의 지향 시스템 만들것”


왕진 가방을 들고 환자들을 찾아 골목 곳곳을 누비는 ‘동네 주치의’가 있다. 주로 걸어서 다니거나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이용한다. 때로는 동네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타기도 한다. 왕진 가방에는 청진기와 설압자(혀를 누르는 데 쓰는 의료도구), 산소포화도 측정기, 주사기, 항생제, 혈액검사 튜브, 혈당계, 줄자 등 각종 의료도구와 의약품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줄자는 거동을 전혀 할 수 없는 환자의 허벅지나 복부 둘레를 측정해 근육과 복수(腹水)의 변동량을 알아보기 위해 꼭 필요하단다. 그는 환자들의 기저귀를 갈고 귀지를 파고 발톱을 깎기도 한다.

이 왕진 가방의 주인은 바로 마을 중심 의료를 지향하며 2012년 서울 은평구에 비영리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을 설립해 현재까지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43) 원장이다. 최근 추 원장은 여성과 성 소수자, 사회 취약계층 등 진료 과정에서 소외되기 쉬운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겪은 일화와 그간의 왕진 경험 등을 엮은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평소 “의사는 약과 기계만이 아니라 관계와 사람의 힘으로 환자를 돌봐야 하며, 증상으로 드러난 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맥락 안에서 질병을 통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27일 오후 살림의원에서 추 원장을 만났다. 이날 추 원장은 자신이 쓴 책을 샀다며 불쑥 방문한 초등학생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병원 앞에서 인근 복덕방 아저씨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기도 했다. 보통 의사 하면 환자의 걱정과 궁금증 등을 배려하지 않는 일방통행식 ‘3분 진료’, 권위주의적인 태도, 과잉진료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날 지켜본 추 원장은 이런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병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삽니다. 출퇴근 때 길거리에서 환자들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우리 동네에서 어떤 일이 화제가 되고 있고 어떤 감염병이 유행하는지 등에 대해 알게 되더군요.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가깝다 보니 주민들이 저를 자연스레 이웃으로 받아들인 듯해요. 저 역시 이곳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진료하는 역할을 맡은 주민의 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지요. 은평구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최근 집까지 샀습니다.”

주민들과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곤란한 일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병원에 왔었던 주민들과 업무시간 외에 동네 목욕탕이나 수영장, 술집 등에서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런 민망한 상황에서 의료상담을 청하는 주민도 적지 않죠. 어떤 주민은 오전 7∼8시 정도나 오후 11시가 넘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합니다. 평소 바빠서 전화가 오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나중에 확인하면 꼭 답을 합니다. 요즘은 문자메시지가 밀려들기도 해요.”

동네 주치의로 일하는 추 원장의 일과가 어떤지 궁금했다.

“보통 일주일에 5일 일해요. 그중 3일은 진료실에서 직접 환자들을 만나고 매주 수요일에는 왕진을 나갑니다. 주로 환자가 사는 가정집이나 장애인·고령자 공동 거주시설 등을 찾죠. 그 외 하루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당뇨·골다공증·고혈압 등 질병 예방 관련 건강강좌를 엽니다. 요즘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을 고려해 주로 온라인 교육을 해요.”


국내에선 아직 왕진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다. 추 원장도 살림의원 개원 초기에는 왕진을 주기적으로 나가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간 왕진 서비스 수가가 병원 진료비와 같아서 (시간과 물류비용 등을 고려하면) 활동을 확대하는 것이 어려웠거든요. 환자들도 미안함과 마음의 부담 때문인지 서비스를 잘 신청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왕진 수가가 상향 조정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정부에서 2018년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에 이어 지난해 말부터는 ‘1차 의료 왕진 수가 시범사업’을 시작하면서 1차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신청만 하면 누구나 왕진을 갈 수 있게 됐어요. 저는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매주 왕진을 나가고 있는데,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루 5∼6가구는 방문합니다.”

요즘은 길 하나만 건너면 병원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주로 어떤 사람들이 왕진 서비스를 이용할까.

“대개 말기 암이나 중증장애, 치매 등으로 거동을 전혀 할 수 없는 환자의 보호자들이 왕진을 신청합니다. 이들의 경우 급할 때는 119 구급대를 이용해 병원까지 갈 수 있지만, 돌아올 때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25만 원이나 주고 사설 구급대를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분들에게 왕진이 절실합니다. 왕진을 나가서 환자의 병세를 보고 입원이 시급한지 아니면 집에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도 좋을지 판단해줍니다. 이처럼 의학적으로 사유가 있는 분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돼 진료비를 30%만 내면 됩니다. 그냥 편의상 왕진 서비스를 신청한 분들은 진료비를 100% 부담하면 돼요.”

추 원장은 왕진을 가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후미진 골목길을 지나갈 때가 많다. 왕진의 여정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도 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빌라에 사는 와상(臥牀) 환자를 1년 반째 진료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고 의식도 떨어져 있어 요양병원에 모셔야 할 상태지요. 그러나 보호자는 난색을 표합니다. 요양병원에 모셔봤지만 그때마다 욕창이나 흡인성 폐렴 등이 생겨서 더 이상 보내기가 무섭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왕진 신청 전에는 고민 끝에 두 달에 한 번꼴로 응급실을 찾았지만 ‘왜 이런 일로 왔냐’는 핀잔을 듣기가 일쑤였다고 해요. 그러나 왕진 이후에는 응급실을 찾는 일이 1년에 한 번꼴로 줄었습니다. 응급실에 갈 때는 환자가 어떤 관리를 받고 어떤 약을 먹고 있으며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등에 대해 소견서를 써드렸죠. 이후 응급실에서는 별 얘기 없이 환자를 잘 봐줬다고 합니다.”

‘잘나가던’ 서울대 의대생이었던 추 원장은 어쩌다 대학병원 의사 대신 동네 주치의를 선택하게 됐을까.

“여성주의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여성주의 없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서 언젠가는 여성주의를 실현할 병원과 의료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어요.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피해자, 성 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마음 놓고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을요. 물론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나 남성이라고 해서 진료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진료받을 권리가 있거든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의료협동조합은 생소한 개념이다. 그래서 살림의원 개원 당시 주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처음에 주민들에게 조합을 만들자고 했을 때 ‘의료기관을 만드는데 왜 우리가 돈을 모아야 하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단계냐’ ‘돈을 투자하면 수익을 나눠주는 거냐’는 등의 반응도 있었죠. 물론 출자한다고 해도 배당은 전혀 없습니다. 주민들에게는 ‘더 많은 돈이 모이고 의료기관 규모가 커지면 의사들이 빚 걱정 없이 보다 양심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고 설득했죠. 결국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조합원이 초기 300여 명에서 지금은 10배 이상 늘었고, 의사도 저 1명에서 시작해 지금은 8명이 됐습니다.”

추 원장은 주민들과 함께 왕진을 가기도 한다. 그의 책에 소개돼 있듯이 환자에게 수치심과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기저귀를 하나 갈더라도 신뢰와 친숙함이 전제돼야 한다. 이럴 때 주민들이 환자와의 관계 형성에 있어 윤활유 역할을 한단다.

추 원장에게 스스로 점수를 매겨본다면 몇 점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한 뒤 솔직하게 90점 정도는 주고 싶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껏 나름 열심히 살았고 성취도 있었지만 남은 도전과 과제도 적지 않다고 했다.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동네 주치의가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최근 전공의 파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쉬움이 컸어요. 정부 정책이나 전공의들의 파업 명분에 동네 주치의를 육성하자는 내용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최대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살아야 같은 길을 가고픈 후배들이 늘어날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어요. 의료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것이 특수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후배 의료인들이 실습이나 구직 등을 원한다면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생각보다 일이 보람되고 재밌거든요.”

최준영 기자 cjy3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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