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그런 공원엔 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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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교수·매체경영학

공익이란 미명 아래 추진하는
송현동 대한항공 부지 공원化

서울市, 민간 개발 사실상 봉쇄
시세보다 싸게 사겠다는 행태

목적 위해 절차 무시한 공권력
성서 읽겠다고 촛불 훔친 셈

세계를 휘젓고 다니기 어려웠던 가난한 시절, 기성세대들은 영화를 통해 먼 나라를 동경했다. 1970년대 초에 개봉된 영화 ‘러브 스토리(Love Story)’는 한국인에게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를 알렸다. 영화의 시작은 공원 내 스케이트장 벤치다. 아내를 떠나보낸 주인공이 눈 덮인 공원 스케이트장을 내려다보며 독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물다섯에 생을 마감한 한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흐와 비틀스를 사랑했고, 그리고 저를 사랑했습니다.”

이 대사 덕분에 당시 라디오 방송 리퀘스트 시간에는 비틀스 곡이 쇄도했고, 바흐와 모차르트 음반도 불티났다. 심플하면서도 감미로운 주제음악은 프랜시스 레이 작품이다. 이후 곧잘 광고방송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됐다.

영화 ‘러브 스토리’는 에릭 시걸 원작으로, 라이언 오닐과 앨리 맥그로가 남녀 주인공 역으로 나온다. 올리버는 명문가 아들이자 하버드 법대생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청년은 이탈리아 이민 가정의 가난한 빵집 홀아버지 딸 제니를 사랑하게 된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소박하게 자기들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가족들의 냉대에도 행복하게 살며 마침내 졸업, 변호사가 된다. 그러나 행복은 아주 잠깐, 아내 제니는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인들에게 순수한 사랑의 위대함을 호소하며 극장에 올려질 때마다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센트럴 파크와 하버드대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1970, 1980년대 이 땅의 청춘들에게 부자 나라 미국에 대한 환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꼭 한 번 뉴욕을 가 보리라, 그래서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에 가서 폼도 잡아 보고 하버드대 도서관에서 기도 좀 받아 와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새롭다.

‘러브 스토리’가 한국인들에게 준 메시지는 분명하다. 계급 격차, 빈부의 거리를 뛰어넘는 사랑의 숭고함이다. 올리버는 극 중에서 명예와 부를 모두 가진 명문가 아들이지만 아빠 찬스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자신이 공부하는 하버드대 도서관도 할아버지가 세웠고, 영화 속 저택은 자동차로도 한참을 달려야 할 정도로 웅장하다. 그런 명문 부호의 아들이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고학으로 공부하고 어렵게 직장을 구하는 모습에 감동 받는 것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또 있다. 도심의 공원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틈날 때마다 찾는 센트럴 파크는 고층 빌딩 숲속 공원이 도시인에게 정서적으로 얼마나 좋은지 일깨워 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뉴욕을 찾는 많은 한국인 여행객은 센트럴 파크에 들른다. 그곳에서 청춘 시절에 본 영화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또,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팬들은 이 괴팍하고 어울리지 않는 전설적인 듀오의 공연이 열렸던 공원 내 명소를 찾아 그때의 분위기에 젖는다.

센트럴 파크는 대도시 공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이 세계적인 명소가 광화문 주변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리도 센트럴 파크 같은 도심의 공원을 갖고 싶어요’ ‘하루빨리 송현동 문화공원을 걷고 싶어요’ ‘송현동 땅을 문화공원으로 추진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등이 적힌 플래카드가 광화문 주변에 군데군데 나타난 것이다. 플래카드를 내건 주체가 묘하다. 근거 없는 주민단체 이름으로 등장한다. 송현동 대한항공 부지를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는 플래카드를 보며 묘한 자괴감을 느낀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유령 단체들이 데모하지 말라며 학교 앞에 내걸던 수법들을 고스란히 닮았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공익 목적으로 공원화를 추진한다면 그 과정도 공정해야 한다. 그러나 공원화하겠다는 땅은 서울시 소유가 아니다. 대한항공이 주인이다. 엄연히 사유재산이다. 남의 땅을 두고 공원화하겠다며 플래카드를 내걸고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3월 서울시는 대한항공에 민간 매각 시 발생하는 개발 요구를 용인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그 의도는 공포스럽다. 누가 송현동을 사더라도 개발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매입 희망자들에게도 이 땅은 깨끗이 포기하라는 경고쯤 된다. 당연히 매입 희망자들이 사라지게 된다. 최근엔 비판 여론이 들끓자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통해 제3자 매입 방식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LH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즉각 부인했다.

대한항공을 편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자금 사정 때문에 내놓은 땅을 매입 희망자들을 쫓아내고 가격을 후려쳐 시세보다 낮게 사겠다는 서울시의 행태에 분노한다. 서울시가 헌법의 기본 가치를 능멸하는 상황. 성서를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는 도둑질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좋다고 절차적 정의(procedure justice)를 완전히 무시하는 서울시가 무섭다. 코로나로 우울한 가을, 서울에도 센트럴 파크 같은 명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멀쩡한 남의 땅을 강탈해 조성한 공원에는 가고 싶지 않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