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⑥ ‘공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 문화일보
  • 입력 2020-11-0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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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변영근 작가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모든 학교의 담장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필요한 정보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고
능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 같다.
그렇다면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의 본질인 ‘인간다움’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인문’은 ‘천문’에 대비되는 말로 ‘주역’에 나온다. ‘문(文)’이 본래 ‘무늬’를 뜻하는 것이기에 ‘천문’의 의미는 비교적 선명하다. 해와 달과 별처럼 ‘하늘(天)에 새겨진 무늬(文)’라는 뜻이다. 따라서 일월성신을 탐구하는 학문을 천문학이라 일컫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에 비춰 본다면 인문, 즉 ‘사람(人)의 무늬(文)’란 몸에 새겨진 문신처럼 인간 내면에 새겨진 본성의 무늬로 읽힐 수 있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이 된다. 이 말은 라틴어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는 말에 잘 맞는다. ‘사람’을 ‘호모’(Homo)라 하고, 거기에서 ‘사람다움’을 뜻하는 ‘후마니타스(Humanitas)’가 나온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이 말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공부(Studia)’라는 말을 붙였다. 그래서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는 ‘인간다움에 대한 공부’라는 뜻이며, 이것이 ‘인문학’이라고 번역된 셈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이 말을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를 로마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말 ‘파이데이아(Paideia)’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만들어냈다. 그리스말로 ‘파이데이아’는 ‘아이(Pais)’를 키운다는 뜻이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아이를 인간답게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파이데이아’의 깊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교육’이라는 말로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키케로는 ‘교육(Paideia)’을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이라는 말로 옮겼을까. 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말이며, 말을 말답게 잘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인문학’은 곧 ‘말의 교육’과 직결된다고 봤다. 그리스에서 말의 교육을 가장 강조한 철학자를 꼽는다면 바로 이소크라테스일 것이다(요즘 장안의 화제가 된 ‘테스 형님’인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이소크라테스’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말에서 ‘교육(Paideia)’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놀이’(Paidia)와 어원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면서 각자의 역할과 협력의 원리, 경쟁과 배려, 존중의 윤리를 배우며 공동체에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생각이 이 두 단어를 연결짓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전통을 지금 소개한 개념들로만 정리한다면, ‘노는 것’이 곧 ‘교육’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며,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공부’다. 서양의 전통이 절대적인 시금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용한 참고 자료라 보고 그에 비춰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라는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금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우리의 교육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변화를 강요받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다.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3 교실은 텅 비었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갈팡질팡했다. 대학 신입생들의 당혹감과 상실감도 적지 않다. 신입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봄날 캠퍼스의 낭만을 영원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신입생은 어떤가? 가슴 설레는 생애 첫 등교의 순간이 여러 차례 미뤄졌고, 학교에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여름방학이 됐으며 곧 1년이 지나간다. 아이들이 오지 않고 비어 있는 건물을 보며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생들은 어떤 의미에서 학생인가? 지금의 사태가 더 장기화된다면, 이 질문은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A 초등학교 고모 선생님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수업을 준비하고 잘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낮아지면서 등교생이 많아지자 선생님은 모처럼 만난 아이들과 함께 가장 보람 있게 지내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고민했다. 그 결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야만 가능한 활동을 최대한 많이 했다. 예컨대 함께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게임하고, 운동하고, 토론하는 활동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러자 아이들도 어렵게 만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즐기려고 노력하며,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물론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게임에서 지면 속상해하고, 책임을 따지면서 싸우기도 하며 간혹 울고불고 난리도 친단다. 그러나 그런 갈등을 아이들과 교사가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면서, 화해하고 스스로 상처를 이겨나가는 치유의 과정을 경험하며 아이들은 또 다른 기쁨과 보람을 나눈다고 한다.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 이러다가 공부 언제 하나, 대학엔 제대로 갈 수 있겠나 하고 걱정하지만, 아이들이 모인 그 시간에 밀린 수업을 할 순 없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을 거쳐 사회로 나가게 된다. 사회에선 다양한 사람이 각자의 서로 다른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협조하며, 때론 갈등하면서 편을 갈라 싸우기도 한다. 그 모습을 잘 들여다보면, 사실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지금 앓고 있는 아픔과 문제점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우리 학교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될 것이다. 지옥에 비유되는 입시 경쟁, 그 속에서 학생들이 겪는 피곤함과 스트레스, 열등감과 좌절감, 질시와 무시, 성적에 근거를 둔 쓸데없는 우월감, 자만심,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 교육 현장에서 목도되는 현실이라면 그것이 곧 우리 사회가 직면하게 될 미래의 모습, 질곡의 심화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연초에 학교가 비대면 수업을 결정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지 않는 강의가 실감 나지 않았고 걱정과 우려가 많았다. 드디어 첫 강의. 화면 속으로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둘 나타나자, 뜻밖의 반가움이 느껴졌다. 집, 카페, PC방, 도서관 등 서로 다른 공간을 배경으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참신한 대면이었다. 이동하면서 출석하는 학생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 이거 참 편리하네!’ 감탄이 나왔다. 이렇게 ‘온라인을 통한 접촉’, 즉 ‘온택트’가 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도 이 일상은 계속 남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지금까지 학교는 많은 인원이 정해진 공간, 정해진 시간에 모여 지식을 습득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물리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학교에는 학생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교가 멈춘 것은 아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수많은 강의가 온라인에서 진지하게 진행된다. 학교의 안과 밖을 가르는 담장이 무너진 셈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훨씬 더 급진적인 상상도 해본다. 모든 대학의 강의가 온라인을 통해 사회 전체적으로 공유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아가 초·중·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의 담장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수업이 학교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것을 가지고 시험을 봐서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워 대학에 보내고, 또 그 성적으로 직장이 결정되던 시스템도 무너질 수 있을 것 같다. 필요한 정보는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고, 능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 같다. 그렇다면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생들과 교육자가 모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의 본질인 ‘인간다움’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개성과 능력을 인정받고 올바른 방식으로 경쟁하며 서로 협조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라면, 우리의 교육은 바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코로나19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신화, 고전기 아테네의 수사학과 철학이 주요 관심 분야다. 저서로는 ‘천년의 수업’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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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공부는 새로 무언가를 알게 되는 행위인 동시에 무지(無知)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자만이 내가 모르는 세계를, 나와 다른 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은 곧 배움의 연속이지만, 일상이 바뀌고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오늘 공부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으로 번역되는 ‘후마니타스(Humanitatis)’ 개념을 최초로 소개한 저서는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기원전 106~43)의 ‘의무론’이다. 키케로는 아들에게 쓴 편지를 담은 이 책에서 도덕적 선(善)은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또 다른 명저 ‘수사학’은 참된 진실을 담아내는 언어의 수사적 힘을 강조한다.

그리스 철학자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는 83세에 발표한 연설문 ‘안티도시스’에서 파이데이아(Paideia), 즉 교육을 통해 얻는 지혜의 의미를 고찰했다. 그에게 지혜란, 영원불변하는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가치관이 어우러지는 삶에서 좋은 의견을 시의적절하게 구성하는 분별력이었다. 이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다른 이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원활한 소통을 이끄는 사람이 곧 전인적 인간이었다. 이 연설문은 ‘어떤 철학의 변명’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로 국내에도 출간됐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도 다시 들춰볼 만하다. 주인공 미자는 ‘문학 수업’이 일깨운 통찰을 통해 윤리적 행동을 결단한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는 공부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 삶의 무수한 기로에서 선택에 대한 영감을 던져주는 행위임을 깨닫는다.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주기적으로 정해진 일을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했는데,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한다면 기적을 만나지 않겠는가.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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