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큰 행운 겪고 난 후 버스타고 일상으로 온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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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가 죽던 날’의 이정은

“사고로 말 못하는 순천댁 맡아
남의 이야기 잘 듣는 기회 돼”

“큰 행운을 겪고 난 후 버스 타고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올해 초 영화 ‘기생충’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대됐던 배우 이정은(50·사진)은 자신이 누린 영광을 이같이 표현했다. 미국배우조합이 주는 최고상인 앙상블상까지 거머쥔 그는 할리우드 작품의 러브콜까지 받았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올 한 해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문화일보와 만난 이정은은 “큰 성과를 낸 후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시점에 코로나19가 터졌다. 개인적으로는 대본을 건네받고 진행 중이던 할리우드 작품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멈추게 됐지만, 기회가 온다면 또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에 아쉽지는 않다”며 “공식 제안은 아니었지만 마블 시리즈 제작진도 스케줄을 물어봤다”고 빙그레 웃었다.

해외로 향하는 문은 잠시 닫혔지만, 이정은의 행보가 멈춰선 건 아니었다. KBS 2TV 주말극 ‘한번 다녀왔습니다’에 참여해 100부작에 이르는 긴 호흡의 연기를 선보였고, 오는 12일에는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 순천댁을 연기한다. 대사 없이 몸짓과 눈빛만으로 풍부한 표현을 보여주는 이정은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는 “말을 안 하니 다른 감각들이 열리고 주변 이들의 말을 더 잘 듣게 되더라”며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나? 지금껏 사투리나 언어유희를 통해 연기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캐릭터를 맡으니 말이 앞서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정은에게는 유독 ‘엄마’ 역할이 자주 주어졌다. 지난해 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 엄마를 비롯해 ‘쌈 마이웨이’ ‘아는 와이프’ 등에서 진한 모성애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금촌댁(월계수양복점신사들), 함안댁(미스터션샤인)에 이어 ‘내가 죽던 날’의 순천댁 역시 이정은 특유의 온기가 느껴지는 캐릭터다.

“어릴 적 연극할 때는 주로 노역(老役)을 맡았기 때문에 요즘 엄마 역할을 하는 건 오히려 젊어진 것”이라고 운을 뗀 그는 “제가 진짜 품이 넓은 사람인 줄 아는데 실제로는 쪼잔하다”고 너스레를 떨며 “‘내가 죽던 날’에서 함께 연기한 (김)혜수 씨가 해준 말인데, 운명처럼 오는 것을 막지도 않고 가는 것을 잡지도 않으며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고 고백했다.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는 이정은. “계획이나 목표는 없냐”는 질문에 그는 “영화를 온전히 극장에서 즐길 수 있게 되길 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시대를 견디고 있는 천생 배우의 현답(賢答)이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