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향기로운 여행과 사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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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동남아 여행서 처음 본 두리안
냄새 고약해 푸대접 받았지만

항우울제 효과 입증 인기몰이
현지 농부들 효자 과일로 격상

세상에 이름은 남기지 못해도
사람도 향기롭게 기억됐으면

화려한 이미지가 넘치는 세상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해외 유명 관광지는 ‘셀카족’ 천지였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다들 사진 찍기에 바빴다. 예쁜 카페에서 맛있는 음식을 보면 스마트폰을 꺼내는 게 습관이 됐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장소(Instagrammable places)’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해외 관광지에서 명품 가방을 들고 화려한 패션을 자랑하는 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저 돈 많으니 제발 훔쳐 가세요’라고 광고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라도 검소하고 겸손한 자세로 현지인과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주위에서 해외에 못 나가니 답답하지 않으냐고들 한다. 하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현지 음식 맛을 내는 레스토랑이 국내에도 있고, 해외 지인들과는 수시로 연락한다. 메신저로 국경을 넘어 무료 통화하고 사진과 동영상도 SNS로 실시간 공유하는 세상이다. 코로나19로 해외에서 일을 제대로 못 하니 국내 일이 더 늘었다. 기업에서 자문이 쇄도하고, 특이한 나라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도 커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작은 단서로 전체를 파악하는’ 베테랑 지리학자라 할지라도 현장을 자주 찾아야 통찰력이 유지된다.

최근, 해외여행에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관광 가이드가 인터넷으로 현지 명소를 소개하는 ‘랜선 여행’ 상품이 등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련한 가이드라도 냄새까지 전하긴 어렵다. 실제로 후각은 오감 중에서도 특별한 감각이다. 보기 싫으면 눈을 감고, 듣기 싫으면 귀를 막고, 먹기 싫으면 그냥 안 먹으면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촉각도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공기 중에 섞인 냄새는 통제가 어렵다. 그래서 후각은 지리학자에게 더 매력적인 도구가 된다. 무조건 그 지역에 가야 도시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문화적 해석도 가능하다. 한편, 악취와 향기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주관적이다. 동양인에겐 고약한 치즈 냄새도 유럽인들에겐 향기다. 반면, 냄새나는 취두부도 중국인들에겐 별미다. ‘김치 냄새’가 예전에는 부끄러웠지만, 그 맛과 효능이 국제적 인정을 받으니 이제는 외국인들이 더 좋아한다.

후각은 은밀한 유혹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냄새가 좋아야 만남이 지속된다. 사랑에 빠지는 데 체취는 결정적이다. 샤넬은 ‘향기가 없는 여자는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가 연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 1921년 출시한 ‘샤넬 No.5’에는 사랑의 추억과 프로방스의 위로가 담겼다. 그래서 메릴린 먼로가 매일 밤 침대에서 ‘샤넬 No.5’만 입고 잤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서 귀향하던 미국 병사들은 아내와 연인을 위한 선물로 샤넬 향수를 골랐다. 요즘도 잘 팔리는 샤넬 향수는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에게 경제적 자유를 선사했다.

세상에서 가장 냄새가 심한 과일로 두리안이 꼽힌다. 바나나·파파야·파인애플처럼 어디서든 자라는 열대 과일과 달리 두리안은 오직 동남아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이다. 2002년 무렵 동남아 현지에서 음식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쓸 때만 해도 두리안은 음지의 과일이었다. 특히, 싱가포르에서 두리안을 들고 대중교통이나 호텔을 이용하면 무거운 벌금까지 내야 했다. 싱가포르를 찾는 서구인들이 두리안 냄새를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동남아 현지인들에게 두리안은 맛도 있고 돈도 되는 행운의 과일이었다. 뾰족한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면 먹을 수 있는 과육이 아주 적은 두리안이 비싼 건 한 통에 10만 원을 호가한다. 농가에서는 두리안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든든하다. 또한, 두리안은 행복과 사랑을 부르는 과일이다. 먹으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니 항우울제가 따로 없다. 굴과 초콜릿처럼 최음효과도 강력해서 두리안 시즌이 끝나고 9개월 뒤에는 출산율이 높아질 정도다.

두리안에 꽂혀 행복한 사람들, 맛있는 음식, 흥겨운 축제를 따라다니다가 동남아를 소개하는 책까지 썼다. 8년 전 국내에서 책을 낼 때만 해도 현지인들조차 두리안에 무심했는데, 최근 두리안이 확 떴다. 우선, 중국인들이 두리안 맛에 반하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KL) 국제공항은 두리안 선물용품으로 도배를 했다. 차량 공유 기업 그랩은 태국에서 두리안을 신속하게 배달하면서 유명해졌다. 중국인들이 두리안을 싹쓸이하자 두리안 농장 투기 붐까지 일었다. 특히 마윈은 ‘동남아에서 가장 탐나는 건 두리안’이라고 할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다. 수요가 급증하고 값이 오르자 동남아 농부들은 이제 기름야자 대신 두리안을 심고 있다.

한국에선 주목받지 못했던 두리안 책이 현지어로 번역, 출간되자 동남아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현지인보다 동남아 문화를 더 깊게 이해하는 한국인 교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과분한 영예를 누렸으니, 내게 두리안은 ‘샤넬 No.5’보다 더 향기롭다. ‘이’제부터 ‘재’미있게 살고 싶어 이름까지 바꿨지만,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면 어떠랴? 행복한 여행의 추억과 함께 내가 사랑한 이들에게 향기로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