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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0년 11월 17일(火)
타락천사에겐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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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 슬픔이여 안녕, 29×40㎝, 종이에 채색, 2020


■ (52) 파리와 사강

그녀의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
낭랑 18세 나이에 심심풀이로
보름 만에 썼다는 천재소녀
내는 책마다 열광·비난속 화제

숨기지 않았던 자본 욕망·쾌락
도박·섹스 등 온갖 중독에 빠져
어둠속 찍힌 음각판화처럼 살았지만
파리는 國葬으로 그녀를 품어


내 유년의 기억 속에 깊은 흉터 하나를 남기고 간 그 일은 열다섯 살 무렵에 일어났다. 프랑스의 한 도발적 소녀가 심심풀이로 보름 만에 썼다는 소설이 화근이었다. ‘슬픔이여 안녕’. 희로애락과 온갖 풍상 다 겪고 난 사람이 인생을 되돌아볼 나이에나 씀 직한 이 제목을 달고, 그러나 소설은 나오자마자 프랑스를 들끓게 했다.

반듯한 수도원 학교 출신의 주인공 소녀가 상상으로나 가능한 모든 불온한 삶을 하나씩 실천해 간다는 것이 내용이다. 주인공은 부유한 그러나 홀로된 아버지 덕에 날이면 날마다 나른한 사치와 쾌락에 탐닉해 있다. 이 불량소녀의 책은 알코올은 물론, 마약과 동성애 같은, 당시로는 ‘금기’의 영역까지 건드렸는데도 덥석 최고 권위의 ‘비평가상’이 주어지게 된다. 소설에 빨려 들어간 나는 책을 읽고 스무 장쯤의 그림을 그렸다.

가슴골이 팬 정도까지만의 여체를 그리고 다분히 몽롱하고 환각적인 얼굴을 연작 형태로 그린 것. 화랑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는 작은 도시에서 역 앞 ‘복지다방’이라는 곳의 한복 입은 마담을 찾아갔고, 빨간 매니큐어의 집게손가락으로 한복의 한 자락을 잡고 서서 그림들을 훑어본 마담은 곱게 눈을 흘기며 전시를 허락해 줬다. 이렇게 해서 가슴 뛰는 생애 첫 전시를 시작하게 된 것. 그런데 내 전시회의 원인 제공을 한 그 프랑스 소녀는 그 책으로 눈부시게 떠올랐고, 그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던 나는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흡사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그 이쁘장하고 귀여운, 고양이를 닮은 소녀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후에도 외모와는 달리 종종 울부짖는 늑대가 사는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여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물론 때로는 샹송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운 분홍빛 연애소설을 써서 청춘 남녀들을 사로잡기도 했다. 흡사 글로 매직을 부리는 요정 같았다.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글쓴이는 쌔고 쌨는데도 그 옛날 나의 상상 속 불량소녀가 구사한 문장이나 책 제목은 이후로 한 시대의 언어 아이콘이 되곤 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결혼은 취향의 문제일 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찬물 속의 한 줄기 햇빛’ ‘삶은 여성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쓴 ‘슬픔에게 말 걸기’ 이후 쏟아져 나온 그 수많은 ‘말 걸기’류의 책들. 발라드풍의 경쾌한 연애와 죽음에의 키스, 반 잔의 블랙커피와 브람스의 선율 그리고 고독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위악적 삶은 문학과 포개지며 아우라를 뿜었고 사람들은 팝가수에게 열광하듯 그녀와 그녀의 책에 열광했다.

일인칭 시점으로 복잡 미묘하게 헝클어진 심리의 흐름을 잘도 끄집어냈던 사진 속의 귀여운 요정 같은 그 옛날의 소녀는 악마가 만든 장난감인 듯 예순 살이 돼서도 옛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 인생이라는 듯 끝없이 도발했다.

소설에서 그녀가 내세운 주인공이 그러했듯 스스로도 동성애, 마약, 알코올, 도박, 이혼 그리고 자살 시도 사이를 오갔다. 이처럼 소설 속의 주인공에는 그녀 자신의 필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흡사 어둠 속에 찍힌 음각 판화처럼 ‘슬픔이여 안녕’ 이후 거의 모든 일인칭 소설에는 주인공 얼굴에 그녀의 초상이 포개진다.

그녀가 소설로 친 마지막 사고, 아니, 마지막 음각 판화는 ‘흐트러진 침대’였다. 이 책의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무덤 속에서 불려 나온 그 옛날의 세실, 아니 사강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언제적 사강이 다시…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 열두 번째 소설에 대해 르몽드는 프랑스 최고의 작품이라며 터무니없을 정도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하며 책을 읽어본 내 소감은 우선 ‘이 여자, 프랑스에 태어나길 잘했다’였다. 내 눈에는 육십이 다 돼 쓴 이 작품은 열여덟 살에 썼던 저 ‘슬픔이여 안녕’의 치기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적인 너무나 프랑스적인 소설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남자를 갈아치우다 서른다섯 살 연하남에게 정착한 소설 속 주인공은 뜻밖에 그에게서 섹스와 쾌락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그 극찬받은 소설의 내용이었다.

우울하고 쿨하고 상큼하고 감미롭고 쌉싸름한, 마치 알랭 들롱 영화 같은 프랑스식 소설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베유와 함께 ‘파리의 여자 3인방’이었다.

좌와 우 혹은 중도 등 출발점은 달랐지만 생제르맹 데프레나 마레 지구 어디쯤에서 서로 스쳤을 법하게 파리식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세 여인은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중적 영향력과 삶의 스펙트럼에서만은 사강이 두 여자를 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아직도 오래된 서점 ‘프낙(Fnac)’에 가면 프랑수아즈 사강은 생생한 ‘현전(現前)’이다. ‘슬픔이여 안녕’에서부터 ‘흐트러진 침대’까지 그녀의 책은 물론 광고지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사진 속 얼굴은 늘 스물대여섯 때의 모습이다. ‘만인의 연인’은 저렇게 늙지 않는 모습이어야 하나보다 싶다.

대부분의 천재적 인물이 그러했듯 사강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단시간에 쓰고 오랫동안 게으름을 즐겼다. 열여덟 살 때의 ‘슬픔이여 안녕’은 보름 동안에, 스물네 살에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20여 일 만에 식이었다. ‘흐트러진 침대’에 파리가 반색했던 것은 그 소설이 ‘무려’ 1년 이상의 집필 기간을 가졌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자본의 욕망, 탐미적 쾌락과 풍요에의 예찬을 숨기지 않았던 그녀. 모르핀 중독과 카지노 중독, 섹스 중독 등 온갖 중독에 금지약물 소지 혐의로 체포되기까지 하는데 이때 TV에 나와서 했다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이후 타락천사의 메시지처럼 인구에 회자된다.

그녀의 동선이나 발언은 늘 이렇게 비난과 열광을 몰고 다녔다. 프랑스의 유명 정치가 장마리 르펜은 그 여자를 단두대에 세워야 한다고 극단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오찬을 하는 장면이 신문을 장식하기도 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2004년 심장과 폐 질환으로 숨을 거뒀을 때의 장례식은, 세상에나 국장(國葬)이었다. 이 또한 프랑스가 아니었으면, 아니 파리가 아니었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파리가 예술가의 천국이라고 하는 말은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1935년 출생. 소설가,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소녀 시절에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래로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흐트러진 침대’ 등 발표할 때마다 문단의 비상한 관심과 대중의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다. 진정한 현대 프랑스 소설의 문을 연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문란하고 분방한 사생활로 젊은층에게 해악을 불러일으켰다며 ‘타락의 문학’ ‘파리의 수치’라는 극단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두 번의 자살 시도와 두 번의 이혼, 체포, 횡령, 기소 등으로 그녀 자신이 그녀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다. 2004년에 사망,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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