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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0년 11월 24일(火)
불꽃같던 조선 여인…‘파리의 저주’는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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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 몽마르뜨의 무희, 45×32㎝, 종이에 먹과채색, 2020




(53) 서울, 파리

최초 여성 서양화가 이전에
시·소설·에세이 썼던 문필가

외교관 남편 따라 간 파리서
언론사 사주 만나 짧은 연애
소문 일파만파… 경성 ‘발칵’

이혼 이후 쓴 ‘이혼고백서’
보부아르‘제2의 성’견줄만

파리 벗어나 현실 마주하니
행복은 신기루처럼 빠져나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가로 출세하기 전 7년의 세월을 파리에서 보냈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에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책을 냈고,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시(詩) 같은 몇 줄의 글을 남긴다.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주어진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처럼 평생을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축제’의 나날을 쓰는 동안 그는 지독한 우울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책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엽총을 자신에게 겨눠 생을 마감한다. ‘파리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파리에서 행복한 자는 파리를 벗어나면 불행해진다는 알고리즘이다. 그러니 파리에서는 지나치게 행복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실 그 도시는 이방인을 어느 정도 몽롱하게 만들고 취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파리를 벗어나 현실의 찬바람 앞에 마주하면 파리에서의 행복은 신기루처럼 빠져나가고 우울로 바뀐다는 것. 몽마르트르를 올라 옛 물랭루주의 간판이 보이는 데서 발을 멈춘다. 문득 ‘파리의 저주’에 걸린 조선 반도의 한 여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이 도시에 왔던 그녀도 저곳의 현란한 불빛을 보았을 것이다. 이 앞에 서서 저 풍경을 보았다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개의 현실을 두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녀가 경성에 돌아가 썼던 일련의 글이 유독 여권과 남녀평등적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 많았다는 것은 확실히 파리 여행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정월 나혜석. 그 이름 앞에는 늘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거추장스러운 관(冠) 하나가 씌워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화가이기 전에 시, 소설, 에세이 등을 전방위로 썼던 문필가이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후세에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연애사건의 주인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에게 굳이 또 하나의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자면 ‘여성운동가’라는 타이틀이 어떨까 싶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했고 그 사적 상황을 공적 논리로 투사했다. 그중 압권이 ‘이혼고백서’였다. 그녀가 처한 고난의 현실은 멀리 남미의 화가 프리다 칼로와 비견될 만했지만, 나혜석은 프리다의 붓과는 또 다른 칼, 펜이 있었다. 그녀는 그 펜으로 홀로 싸웠다. 한마디로 화(畵), 문(文) 양쪽에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었지만 앨버트로스 새처럼 대양을 날지 못한 채 상처 입고 부러진 날개로 하염없이 피 흘렸던 생애였다.

“어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예전에 그 책을 읽으며 나는 두 번 울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신문글로 썼다. 그이가 고달픈 몸을 한때 의지했던 작은 암자가 서울대 쪽 관악산 중턱에 있었는데 산을 오를 땐 그 툇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곤 했다. 오랜 세월 후 당신의 피붙이가 장성해 바로 그 산 아래로 옮겨온 대학에서 교원으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암자에 머무는 동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어 몰린 현실은 가혹했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의 삶이었을 테니까. 1980년대 중반의 교수 초년 시절 그 암자에 갔다가 기적처럼 정월을 기억하는 한 노승을 만났다. 그분이 홀로 기거했다는 방을 보여주었고 해가 지도록 저 툇마루에 앉아 있곤 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절절한 외로움이 전해져왔다. 어느 날 작별을 고하며 암자를 떠난 그이는 얼마 안 돼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게 되고, 신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아무개가 서울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했다는 한 줄 부음기사가 떴다.

나혜석이 꿈같던 파리여행에서 현실의 찬바람들로 되돌아온 것은 1929년 3월, 떠났던 부산으로였다. 칠십 노모와 올망졸망한 세 아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는 스산한 그 풍경을 이렇게 썼다. “이제부터 우리의 전도(前途)는 어떻게 전개되려는고.” 어쩌면 이미 귀국 가방을 꾸릴 때쯤 여행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불행의 날들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파리에서의 꿈같은 행복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혜석의 여행 기간은 총 1년 8개월. 출발은 남편이었던 외교관 김우영에 대한 일종의 포상휴가였지만 함께 떠났던 두 사람은 따로 돌아오게 된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며 유럽의 미술계를 두루 돌아보고 싶다고 희망했던 이유에서였다. 처음 부산진을 떠나 경성을 거쳐 시베리아 중단열차를 타고 유럽 땅에 내린 그녀는 파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남편이 업무로 귀국한 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홀로 여행한다. 귀국 때는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가서 뉴욕 미술계를 둘러보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간 다음 하와이에 머물다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항으로 되돌아오는 경로를 택했다. 그 당시 아이가 셋씩 달린 데다가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던 조선 여성으로서는 그 여행의 경로 자체가 경이로움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에 그리도 목말랐던 것일까. 하나라도 더 보고 본 것마다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어 돌아가면 그 추억의 시간을 다시 꺼내 곱씹으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파리에서 운명적인 사건 하나가 생기게 된다.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한 언론사 사주 최린(1878∼1958)을 만나게 된 것. 외국어가 자유로운 데다 훤칠한 용모의 그와 만나 와인 잔을 부딪치다가 그만 짧은 연애에 빠지게 된다. 소문은 그야말로 일파만파. 그녀가 아직 파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 경성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그 얘기가 들끓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됐을까. 파리의 몽롱한 매직에 걸렸던 터였다. 이역에서 만난 같은 동포라는 반가움, 거기에다가 우연히 한 호텔 투숙, 오랜만에 와인 잔을 앞에 놓고 나누는 한국인끼리의 지적인 대화들, 그리고 문화적 취향 같은 것들이 ‘악마의 덫’이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는 이렇게 썼다. “묵직한 바윗덩이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건만 나를 빼놓은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다. 이 갑갑함을 어이 견뎌 나가야 하나….”

▲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그녀가 경성으로 돌아와 보니 소문은 실제보다 서른 배쯤 부풀려진 채 저희끼리 뭉쳐 다니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 막고 귀 막은 채 칩거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삼천리’ ‘매일신보’ ‘신동아’ ‘동아일’ ‘신가정’ ‘동광’ 같은 매체가 줄지어 그의 원고를 기다렸다. 그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의 동향에서부터 시작해 문화적 약소국인 데다가 식민지로서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살려 나가야 할지의 거대 담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고 폭넓은 글을 썼다. 그러나 악마의 이빨 같은 소문은 저희끼리 뭉쳐 다니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와 남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공직자였던 김우영은 급기야 나혜석과 이혼하게 되는데 이때 발표했던 ‘이혼고백서’가 또 한 번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그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비견될 만한 당당한 여성의 실존 주체적 자기선언이었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무를 무렵에 헤밍웨이도 그 도시에 있었다. 나혜석과 최린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헤밍웨이 역시 파리에서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을 두고 폴린 파이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파리의 매직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

다채로운 재능을 타고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수원의 한 부유한 집안 딸로 태어나 1913년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가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런가 하면 1918년 ‘여자계(女子界)’에 단편 ‘경희’를 발표해 소설가로도 데뷔한다. 약혼했던 시인 최승구(1892∼1917)의 돌연한 사망으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소개로 만난 외교관 김우영(1886∼1958)과 결혼하면서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안동과 만주 등지에서 살게 되고 김우영의 포상휴가에 동행하며 유럽 땅을 밟게 된다. 1년 8개월의 해외체류 후 귀국해 최초의 서양 문화예술 견문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기행문, 에세이 등을 발표한다. 파리에서의 연애사건이 빌미가 돼 이혼한 후 종적을 감췄다가 행려병자로 서울시립 무연고자 병동 자제원에서 생애를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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