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⑨ 여행 - 떠나고 싶은 본능에 대하여

  • 문화일보
  • 입력 2020-11-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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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곽명주 작가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여행은 욕망 … 그러나 결국 타자·바깥을 생각하게 되는 일
그것을 통한 경험과 수용, 사상·문화에 큰 영향 미쳐와
코로나 이후 관광 절차 복잡해지고 가격 비싸질 테지만
여행 본질은 대면 …‘형태’ 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4년 전 겨울이었다. 핀란드 북극권에서 170㎞ 더 북쪽으로 올라간 작은 마을 ‘레비’. 수은주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간 그 밤, 침엽수림 설원의 푸른 어둠 속에서 동료들과 오로라를 봤다. 나흘을 기다리다 모두 포기한 일정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여행의 의미가 ‘본다’는 것에 있다고 믿었던 때. 오로라는 그 열망의 정점에 있었다. 초록빛과 붉은빛이 차가운 북극권의 밤하늘을 커튼처럼 휘감는 오로라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오로라는 ‘그걸 보았다’는 게 아니라, ‘누구와 보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 여행에서 깨달은 건 여행의 목적이 단지 ‘목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평생 기억할 만한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맞이한다는 것. 오로라가 가진 판타지의 중심, 아니 여행의 중심은 바로 거기 있었던 게 아닐까.

전례 없는 시간이었다. 전 지구의 산업과정이 가치사슬로 연결됐으며, 축약된 시간이 물리적 거리를 압축했다. 서울이 남해안의 작은 포구보다 도쿄(東京)나 방콕, 뉴욕과 더 가까웠던 세상이었다. 네트워크의 시대. 여가 시간은 늘어났고, 국경을 건너는 절차는 단순해졌으며, 항공기 요금은 싸졌다. 거리(距離)는 시간과 비용으로만 환산될 따름이었다. 2019년. 전 세계에서 14억 명의 여행자가 국경을 넘어 여행했다. 어디든 가고 누구나 만났던, 그게 너무나 당연해서 얘깃거리조차 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불현듯 재앙처럼 덮쳐 우리 삶을 가둬버린 코로나19 이전까지는 말이다.

감염병의 창궐은 실존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 오래전 위대한 철학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대답한 질문이다. 이런 실존적 질문 앞에서 이런 질문은 좀 사소해 보이긴 하다. 왜 여행하는가. 위기에 처하거나 불안에 휩싸일 때 ‘왜 사느냐’는 질문을 소환하듯, 여행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여행을 질문한다.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여행의 요체는 욕망이다. 자유롭고자 하며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인간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게 감행한 여행이 교양이 되고 자각이 된다. 여행은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으로 관점이 전환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자고로 철학자들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완성해온 건 우연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수렵·목축기는 생활이 곧 여행이었다. 인류 최초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 그리스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도 여행이 주요한 모티브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행을 경험한 철학자다. 여행을 통한 경험과 문화 수용이 철학자들의 사상뿐만 아니라 대중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여행의 욕망 뒤에는 자각이 있다. 욕망과 자각은 어떤 때는 분리돼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몸이기도 하다. 때로는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여행이 자아 형성에 기여하고 인간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믿었다. 갈 필요가 없는 곳을 가고,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여행이다. 그런 불필요한 행동 속에서 여행자는 ‘타자’와 함께한다. 타자와 만나는 것이나 바깥의 목격자가 되려는 게 본래 여행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여행은 결과적으로 타자와 바깥을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여행이 금지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일부 국가끼리 자가격리 없이 양국을 제한적으로 오가는 ‘트래블 버블’이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여행해야 하는가, 여행하지 말아야 하는가. 국경을 넘지 않는 자국 여행은 권고되는 분위기지만, 그것도 확실치 않다.

한국 사회는 외국인에게 덜 너그럽다. 생물학적 인종뿐 아니라 다른 문화적 집단에 대해서도 차별적이다. 누군가 감염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면 곧 그들이 속한 집단과 계층을 손가락질한다. 한국의 트래블 버블의 가장 큰 걸림돌은, 파트너가 될 법한 역내(域內) 이웃 나라, 그러니까 일본, 중국과 역사문제로, 또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따른 여론으로 강력하게 통제돼 왔고, 중국에 대한 태도도 정치적으로 해독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하나의 질문. 코로나 이후의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걱정스러운 전망부터. 여행의 절차는 복잡해지고 가격은 비싸질 게 틀림없다. 코로나19 확산 직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적은 돈으로 국경을 넘어 여행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와 같은 대량 소비에 따른 비용 감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인가. 코로나19의 위기가 백신 개발로 극복되더라도 의문시되는 건 감염병 위협의 폭발적인 강도를 경험한 이후에 ‘여행산업에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 것인가’다. 기왕에도 테러와 국지적 전염병, 그리고 중국이 사드 보복으로 보여준 관광의 경제보복 수단화로 관광산업의 리스크가 부각되던 상황이었다. 리스크가 크다면 비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비용문제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보다 안전을 위해 여행의 시간은 짧아지고, 이동 거리는 가까워질 것이다. 목적지 국가의 보건 수준도 고려되겠지만, 서구사회 체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여행자들에게 중요해진 건 ‘여행 중 문제가 생기면 얼마나 빨리 자국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다. 결국 ‘가까운 나라’만이 해답이다. 중국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유럽과 미주에서 아시아 여행자에게 가해진 공격과 테러의 기억도 먼 곳으로 향하는 긴 여행을 쉽지 않게 할 것이다.

코로나가 백신으로 극복된다 해도 한동안 질병 확산의 공포로 드러난 타자에 대한 비이성적인 몰이해와 증오는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다. 바깥, 혹은 타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마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타인과의 끈을 붙잡아주는 게 여행이지 않을까.

신뢰와 환대를 주고받으며 타자를 이해하는 경험은 여행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2017년에 펴낸 책 ‘관광객의 철학’에서 공동체주의(내셔널리즘)와 자유지상주의(글로벌리즘)의 배타적 시대에 타자에 대한 관용을, 관광객이란 개념을 통해 살려내자고 주장한다. 가난한 이들의 고단한 삶과 환경오염으로 가득한 도시를 지나쳐가는, 이해관계 없는 관광객의 시선이야말로 바깥과 타자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책에 나오는 철학적 비유인 관광객은, 실제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행이 중단된 시대에 시도되고 있는 건 ‘유사(類似)여행’이다. 사진을 꺼내서 과거의 여행을 추억하다가 급기야 여행을 온라인으로 가져와 랜선 여행을 시작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지에 착륙하지 않은 채 상공에서 되돌아오는 여행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대면과 랜선이 여행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 여행의 본질은 대면이고 접촉이다. 목적지 상공을 선회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여행상품의 등장은, 억눌린 여행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증명할 따름이다.

여행이 중단된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보자. 많은 곳을 다녀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가,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걸 후회하는가, 여행지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걸 후회하는가. 가거나 보는 장소의 숫자가 아니라 보내는 시간의 질에 여행의 가치가 있다는 건 명확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나 다 다르다. 그게 여행으로 충족하는 나의 욕망과 자각의 방향이고, 바깥을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시 공항에 길게 줄을 서서 출입국 수속을 기다리거나, 흥청거리는 바에서 낯선 사람 옆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거나, 한 방에 예닐곱 명이 들어가는 게스트하우스에 묵거나, 인파로 북적이는 이국의 쇼핑몰을 느긋하게 둘러보는 일이 가능해질까. 많은 사람은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쏟아내고 있지만, 적어도 여행의 형태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여행자들이 여행지 호텔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환대는 비대면의 차가운 터치가 아니라, 호텔 프런트와 컨시어지의 정중한 태도일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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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가고, 누구든 만나는 여행이 다시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생각한다. 최악의 감염병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아픈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했다. “회복기는 우리에게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니체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아픈 날들에 감사해야 한다. 그 시간이 지금의 내가 되도록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플 때,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은 왜 여행하는가. 여행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박경일 여행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여행은 비일상을 향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여행자는, 설렘 속에서 모든 것을 관찰한다. 풍경은 물론이고 소리, 냄새, 맛에 몰두한다. 감각에 몰두하는 건 감별이 아니라 ‘즐거움의 이유’를 찾기 위한 태도다. 유쾌한 여행은, 실은 이런 여행자들의 ‘너그러운 태도’에서 출발한다.

국경을 넘는 여행은 중단됐지만 ‘여행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 평범한 일상을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기.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것을, 마치 이곳에 오늘 처음 당도한 여행자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자. 일상의 작은 것을 향한 시선이 여행의 흥분으로 설레고,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는 여행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되찾아 줄 수 있지 않을까. 무딘 마음을 벼려 여행의 설렘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일, 그게 여행이 중단된 시대를 건너가는 훌륭한 방법이다.

여행 책보다는 지도가 가지 못하는 여행을 위로하는 데 효과적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종식 후에 가고 싶은 곳의 지도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한껏 부풀게 한다.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보는 온라인 전자지도 말고, 직관적으로 전체 공간을 느낄 수 있는 종이로 된 지도 말이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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