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안 읽는데 서평誌가 될까? 잘 만들면 잘 되겠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5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홍성욱 교수가 새 책 ‘실험실의 진화’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신창섭 기자

- ‘서울 리뷰 오브 북스’ 편집장 홍성욱 서울대 교수

“책은 죽었다고 탄식하기 전
양질의 서평 없는 현실 봐야”

“우리 잡지 좋으니 팔릴 테고
나아가 시장까지 형성할 것”

준비號에 김초엽·김혼비 글
후원금 펀딩 2600만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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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시장이 어렵다고 하지만 가끔 신기한 일도 일어나잖아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100만 부 가깝게 팔리는 현상처럼요. 매주 수백 권의 신간이 쏟아지는데, 왜 ‘한국에선 안된다’고들 하는 걸까요. ‘책은 죽었다’고 탄식하기 전에 양질의 서평지가 부재한 현실을 먼저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지난 25일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를 만났다. 신간 ‘실험실의 진화’(김영사)가 막 나왔고 흥미로운 새 직함도 생긴 터였다. 김홍중, 김영민, 강예린, 송지우 등 서울대 교수 등이 주축이 돼 창간하는 전문 서평지 ‘서울 리뷰 오브 북스’(SRB) 편집장이 홍 교수다. 교양 과학·과학사 저자로 유명한 그가 이번엔 ‘재미있는 서평지’를 만들겠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서평이나 영국의 ‘런던 리뷰 오브 북스’(LRB) 같은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생각한 지는 오래됐어요. 적잖게 문의와 제안도 해봤고…. 그러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이게 됐네요. 말 꺼낸 사람이 총대 멘다고, 어쩌다 편집장 맡아….”

SRB는 다음 달 0호(창간준비호)를 시작으로 내년 3월부터 계간지 형태로 발행할 예정이다. 학계와 출판계에서 전문성과 ‘글발’을 인정받은 교수들이 편집위원으로 대거 이름을 올렸다. 또 요즘 인기 있는 작가 김초엽, 김혼비, 박솔뫼 등이 0호 필진으로 꾸려져 더 주목된다. 텀블벅 펀딩도 30일 현재 730여 명의 후원자, 2600여만 원의 후원금을 모아 화제다. 이미 목표치의 두 배 이상 달성했다. 홍 교수는 “기대 이상 반응에 놀랐다”며 “제대로 된 서평에 목마른 독자가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중쇄(초판 이후 두 번째 인쇄에 들어가는 것)를 찍는 책이 드문 국내에서, 본격 서평지를 표방하는 SRB를 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기다렸다. 기대된다’도 있지만 ‘과연 될까’라는 걱정도 크다. 홍 교수는 “혁신적인 제품들은 늘 ‘안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며 “결국 제품이 좋으면 팔리고 시장을 형성한다”고 했다. “좋은 제품, 그러니까 좋은 글을 지속적으로 쓴다면 독자는 생겨날 거라고 봅니다. ‘좋은 말’만 하지 않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자연스럽게 반론이 거듭되는 ‘논쟁’도 환영합니다.”

전문성과 가독성을 갖추면서도 SRB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재미’다. ‘좋은 서평’의 기본이고, ‘책의 위기’를 타개하는 출발점이다. 홍 교수는 “영화 팬들이 영화평을 읽고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리듯, 독자들이 서평 ‘읽는 재미’를 느끼길 원한다”고 했다. 관건은 지속성인데 80% 후원으로 운영되는 LRB를 모델로 하면 승산이 있다는 게 홍 교수의 말이다. “LRB도 창간 후 여러 어려움을 겪고 버틴 끝에 영국 지식 시장을 주도하게 됐어요. 10년 정도 길게 내다보며 나아가야죠.”

‘꿈꾸는’ 구독자 수는 4000∼5000명. 조금 잘 팔리는 단행본의 초판 부수다. 뭐 이리 소박한가 싶기도 하지만 이조차 국내 출판 현실에선 만만치 않다. 하지만 ‘사피엔스’ 100만 독자를 떠올리면 가능할 것도 같다. 그것의 200분의 1 정도 아닌가. 김영사에 따르면 이 책은 전자책을 포함해 이달 중 누적판매량 100만 부를 넘어설 전망이다.

SRB는 정기적으로 서평 기사를 싣는 국내 일간지와도 차별화한다. 상대적으로 시간적 제약이 적으니 저자의 명성이나 출판사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좋았으나 묻힌 책’도 발굴할 예정이다. 국내 출간되기 전인 해외 원서도 비평한다. 창간호(1호)에 ‘오바마 회고록’이 실리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홍 교수는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들이 없다. 더 정비해야 한다”며 SRB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담스러워했다. 기대와 우려를 안고 시작하는 일이니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날 나온 새 책 ‘실험실의 진화’는 묘하게 이번 서평지의 탄생과 연결되는 듯했다. “한국에서 서평지는 안 될까”라는 의문을, “실험해 보면 알지”라는 과학자다운 실천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는 어떤 공약이나 예측도 섣불리 하지 않았다. 결과는 한국 책 시장과 독자들이 참여할 보이지 않는 ‘실험실’에서 증명될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실험실’의 존재를 역사적·철학적으로 풀어낸 ‘실험실의 진화’는 홍 교수가 제자와 함께 만든 책이다. 홍 교수의 글에, 서울대 생명과학부 학생인 박한나 씨가 70컷의 그림을 그렸다. 과학적 고증과 예술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삽화가 인상적이다. 홍 교수는 “모든 것이 실험실에서 출발한다. 그 안에 사람도 있고, 논휴먼(비인간)도 존재하는데, 그것을 길들여 인간을 위한 것으로 바꾸는 장소”라고 했다. “백신과 마스크 등 팬데믹을 이기는 것들도 다 실험실 속에 있어요. 물론 코로나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음모도 있지만…, 하하.”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