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세계지도로 여는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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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코로나 근본 원인은 환경 파괴
메르스·에볼라 등 연이어 창궐

이제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
모든 생명체와 공존 노력 필요

지구 차원서 함께 해법 찾을 때
새해엔 달력보다 지도를 펴자

6·25전쟁 당시 열두 달 365일과 함께 큰 한반도 지도가 담긴 ‘지도력(地圖曆)’이 유행했었다. ‘전쟁은 최고의 지리 교사’라는 격언을 입증하듯 피란민들은 지도를 보며 안전한 곳을 찾아 이동했다. 전염병과의 전쟁, 방역(防疫)에서 지도는 유용한 도구다. 19세기 영국 의사 조 스노는 런던의 콜레라 환자 발생지를 지도화하며 전염병의 발원지를 규명했다. 올 초 국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도 한 대학생이 만든 코로나 지도 앱이 화제였다. 정확한 정보가 담긴 지도는 나의 생명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힘이 된다.

1960년대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는 장롱·이불과 함께 신혼부부의 3대 혼수품이었다. 지도와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누빈 김찬삼은 ‘돈이 없어도 열정과 용기만으로도 세계여행이 가능하다’는 꿈을 심어줬다. 산악인 엄홍길, 작가 김영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던 한비야 모두 ‘김찬삼 키드’였다. 차멀미가 심한 지도맹 소녀였던 나도 그 덕에 100여 나라를 답사한 지리학자로 성장했다. 또한, 한국 기업의 눈부신 성장 배경에는 세계지도가 있었다.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50000 대 1 지도’와 조선소가 세워질 ‘백사장 부지 사진’만 들고 유럽으로 날아가 선박 수주에 성공해 결국 배와 조선소를 동시에 완성하는 기적을 일궜다. 김우중 대우 회장 역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신시장을 개척하고 한국의 경제영토를 넓혀 ‘김기스칸’으로 불렸다.

올해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19의 근본 원인은 기후변화, 특히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다. 서기 1년 1억 명이던 세계 인구는 1800년 10억 명, 1927년 20억 명, 1974년에 40억 명으로 급증했고 올해는 77억 명을 훌쩍 넘겼다. 1세기 전만 해도 인간이 차지한 땅은 육지 면적의 14% 정도였지만, 이제는 77%나 개발돼 야생의 자연은 20%가량만 남았다.

숲에서 조용히 지내던 바이러스가 절규하며 인간 세계로 뛰쳐나온 지난 30년간 300여 종의 새로운 감염병이 생겼다. 각종 동물·식물·병균 등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제한된 서식지를 두고 인간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사스·메르스·에볼라·지카에 이어 코로나19까지 나왔다. 코로나19 백신이 나오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언제 어디서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나타나 인간을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전염병 수시 창궐’은 이제 정해진 미래가 돼 간다.

미국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1910∼1993)은 “유한한 지구 위에서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구실에서 수치와 통계만 분석하고 현실에 무관심한 ‘안락의자(armchair)’ 경제학자들은 2008년 금융위기나 코로나19 사태 등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국내용 표밭 분포도에 갇힌 정치인들 역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현장에 강한 지리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슈퍼 바이러스의 확산과 팬데믹 위기를 경고해 왔다. 특히, 영국과 북유럽 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아닌 ‘기후 위기’라며 인간의 탐욕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왔다.

1969년 미국 미네소타 소도시에서 태어나 동식물의 생태를 연구해온 호프 자런 박사는 ‘랩걸’의 저자이자 환경운동가로 활약 중이다. 단기적 성과와 경제적 효율성만 중시하는 미국 대학에서 고군분투하던 자런 교수는 최근 노르웨이의 오슬로대로 이직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하며 쓴 책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 그는 지구 환경을 파괴해 온 자신의 지난 삶을 성찰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창궐과 기후 위기를 초래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미래 세대에게 반성문을 쓴 셈이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지만 에너지 소비는 10배, 화석연료 사용은 9배나 늘어 ‘기후 악당 국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지금까지는 촘촘한 택배 네트워크와 엄격한 통제 정책으로 코로나19 위기를 버티는 중이지만,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은 아니다. 경제적 부담과 고통이 가중되는 가운데 매일 배출되는 포장 용기 쓰레기만 해도 엄청나다.

모두가 코로나19를 촉발한 범인임을 고백하고 담대한 전환을 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국내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은 근시안적이다. 국내 서점가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를 예측해 돈 버는 데 도움이 되는 경제·경영서가 여전히 베스트셀러다. 바이러스가 몰고 올 새로운 경제학을 ‘브이(V)노믹스’로 명명한 트렌드 전문가는 ‘코로나 이후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이 아니라 속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고, ‘돈보다 생명이 우선’이라고 본다. 특히, 혼란이 계속되는 전환기에는 정확한 최신 지도를 보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이어령 선생은 “연초에 달력을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지도를 펼치는 자가 앞으로 다가올 100년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2021년 새해에는 달력 대신 세계지도를 펼치고 신년 계획을 세우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