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문화 시점>수학풀이·필사·명상… ‘몰입’의 재발견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이 힘든 ‘코로나 시대’에 수학 문제 풀기나 성경 필사 등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통해 마음을 달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무너진 일상, 매일 규칙적인 취미생활로 성취감 느껴
온라인 화상 ‘줌’ 모임 만들어 함수·미적분 공부
성경 구절 필사하고 블로그·인스타그램에 올려 ‘인증’
잠들기전 명상하고 컬러링북에 유화 색칠하기도

지역 보건소에서 정신건강 상담사로 일하는 이제형(27) 씨는 하루 30분씩 수학 문제를 푸는 재미에 빠졌다. 정답 없는 고민을 마주하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라는 허무함에 지칠 무렵 ‘수학’을 발견했다. 학창시절 수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지만 뒤늦게 중학교 문제집을 사서 ‘정답이 있는 세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다. 그는 “때가 때인 만큼 자해나 자살 관련 상담이 느는데 조언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더라”며 “온갖 잡생각에서 벗어나 문제 풀이에만 집중하다 보니 일상과 직장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고 전했다.

감염병이 바꿔놓은 일상 속에서 ‘몰입’을 통해 ‘코로나 블루’를 이겨내는 취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수학 풀이부터 명상, 그림 색칠하기, 성경 필사 등 종류도 다양하다. ‘집콕’ 시대 방구석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정해진 계획대로 훈련하는 운동선수처럼 ‘1일 1○○’으로 ‘코로나 시대’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줌’으로 수학 모임하는 직장인

수학 강사인 김가영(38) 씨는 네이버 카페 ‘행복한 수학’을 운영하고 있다. 직장인, 학부모, 취업 준비생 등 다양한 이와 일주일에 한두 차례씩 방정식, 함수, 미적분 등을 공부한다. 원래는 대면으로 진행하던 모임을 최근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으로 바꿨으나 ‘취미 수학’ 열풍 속에 10명 남짓이던 수강생은 오히려 20명으로 늘었다. 김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잠잠해지면 오프라인에서 ‘페르마의 밀실’ ‘무한대를 본 남자’ 같은 수학 영화를 같이 보고 토론하는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부 정진효(43) 씨는 지난여름부터 중학생 딸과 함께 매일 성경 구절을 받아적는다. 오후 11시 딸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식탁에 앉아 3절씩 필사한다. 분량이 얼마 안 돼 10분이 채 안 걸린다. ‘성경 필사’는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를 달아 검색하면 4만5000개 게시글이 나올 만큼 주목받는 ‘신앙 취미’다. “우연히 블로그에서 모임 모집 글을 보고 시작했어요. 27명이 모인 ‘단톡방(단체 카톡방)’에 필사한 구절을 사진 찍어 올리면 하루 ‘숙제’가 끝나요. 딸이 ‘사춘기 병’을 앓는 시기다 보니 관계에 어려움도 있었는데 취미를 공유하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하루 목표를 가볍게 설정한 덕분에 4개월 반 동안 숙제를 거른 날은 사흘밖에 없어요(웃음).”

공무원 시험 준비생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하는 권영주(33) 씨처럼 ‘명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잠들기 전 한 시간씩 ‘호오포노포노’ 명상을 한다. 하와이에서 유래한 ‘상처 정화법’인 이 명상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용서하세요’를 반복적으로 되뇌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종종 화가 치밀어 오를 땐 목청껏 소리치는 ‘분노 명상’을 하기도 한다. 그는 “차분하게 눈을 감아야만 명상을 할 수 있다는 건 선입견”이라며 “가슴에 쌓인 화를 쏟아내는 ‘분노 명상’은 효과 만점”이라고 전했다.

강의 콘텐츠 기획자인 박은혜(34) 씨는 올해 9월부터 틈틈이 유화를 그린다. 밑그림과 물감, 붓과 팔레트 세트인 ‘컬러링북’을 사면 특별한 재주가 없어도 멋진 작품을 손에 쥘 수 있다. 몇 달 동안 만화 ‘빨간 머리 앤’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완성했다. “약속이 취소되고 집과 회사만 오가는 와중에 ‘기댈 언덕’이 필요했어요. 음악을 틀어놓고 붓질을 하니 상념이 가라앉고 생각지 않았던 성취감도 생기더라고요.”

◇무너진 일상서 찾은 ‘몰입’의 기쁨

그렇다면 ‘수포자들’이 수학을 찾고, 명상 같은 취미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바뀐 일상 속 새로운 방향성 찾기’와 ‘몰입의 경험’을 얘기한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전거가 가만히 서면 넘어지듯 사람도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 방향성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며 “외부활동이 힘들어진 가운데 사람들이 혼자 즐기는 취미를 찾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수학 문제 풀기, 명상, 성경 필사는 ‘몰입의 경험’이 중요한 취미”라며 “집중과 몰입을 통해 잡념을 잊는 경험은 특별한 기쁨을 준다”고 설명했다.

하루 한 번, 규칙적인 취미생활에 발맞춘 책들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365 수학’(사이언스북스)은 국내 학자들이 지라르-페르마의 정리, 원주율, 완전 순열 등 수학에 얽힌 여러 명제를 1년간 매일 한 편씩 읽을 수 있도록 엮었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이 쓴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수업 365’(위즈덤하우스)는 7가지 주제를 요일별로 나눠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일러준다. 탁상달력 형태의 ‘나태주, 시간의 쉼표’(서울문화사)는 시인 나태주가 하루 한 편씩 고른 시 구절에 그림을 곁들여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