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문화 시점>봉준호·BTS 세계 휩쓸고… 넷플릭스·온택트 공연 집콕 달랬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올해 문화계에는 다양한 움직임이 펼쳐졌다. 방탄소년단(왼쪽)의 K-팝, 봉준호(오른쪽) 감독의 한국영화, 비대면으로 열린 클래식 공연과 전시, 그리고 당사자의 입을 통해 본 문학과 한 걸음 더 진화한 여성 서사가 눈에 띄었다.

■ 2020 문화계 결산 키워드 7

2020년은 어쩌면 캘린더에서 지우고 싶은 한 해였을지 모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가 가장 치명적인 위기에 빠졌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문화계에선 괄목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빌보드와 그래미를 휩쓸며 세계적인 그룹으로 인정받은 방탄소년단(BTS)과 아카데미를 정복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그리고 한류 드라마와 다양한 온라인 공연 등이다. 또, 우울한 상황 속에서 죽음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당사자의 시선에서 다룬 문학작품들과 여성 서사도 크게 부각됐다. 올해의 문화계를 7개의 키워드로 요약했다.

‘기생충’ 아카데미 4관왕 위대한 쾌거

① 봉준호, 자막 1인치 장벽 넘다
올해 전 세계 영화계는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에 열광했다. 시작은 2019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부터였다. 한국 감독 최초로 칸의 최고 영예를 차지하더니 올해 초엔 미국의 자부심이자 권위의 시상식인 아카데미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관왕에 올랐다. 백인 중심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보수적인 무대에서 아시아 사람이, 그것도 한국어로 된 영화가 수상한 것은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가 시상식장에서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한 소감은 ‘아메리칸 퍼스트’에 젖어 있던 미국과 세계에 큰 울림을 줬다. 하지만 봉 감독을 이어갈 한국영화의 성장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이고, 한국영화가 다시 칸과 아카데미에 서는 날이 올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코로나 수혜… 전세계 1억9500만 가입

② 넷플릭스, 새로운 습관을 만들다
넷플릭스는 처음엔 영화 비디오를 대여해주는 업체였다. 1997년 비디오·DVD를 우편이나 택배로 배달하는 서비스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사업을 확장한 게 2007년이다. 이후로 넷플릭스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셋톱박스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선두에서 개척했고, 2013년 미국 최대 케이블방송 HBO의 가입자 수를 넘어섰다. 2020년 현재 전 세계 190여 개국에서 1억9500만 개 이상의 유료 멤버십을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위축되면 될수록 비대면의 총아 넷플릭스는 더 높이 날았다. 극장가는 관람객 감소로 위기에 처했으나 넷플릭스는 매주 새로운 오리지널을 선보이며 유료회원을 늘렸다. 여기엔 한류 콘텐츠의 역할도 매우 컸다. 조선판 좀비물 ‘킹덤’을 시작으로 ‘사랑의 불시착’ 같은 한류 드라마, 크리처물 ‘스위트 홈’까지 넷플릭스와 한류가 ‘윈윈(Win-Win)’했다. 이제 넷플릭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현빈 ‘사랑의 불시착’ 일본서 열풍

③ 드라마 한류, 다시 불붙다
3차 ‘드라마 한류’ 시장이 열렸다. 2000년 중반 일본에 욘사마(배용준) 열풍을 불고 온 ‘겨울연가’가 시작이었고, 일본의 우경화인 혐(嫌)한류 기조 속에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중국발 2차 드라마 한류가 시작됐다. 이후 ‘한한령(限韓令·한류콘텐츠 수입제한명령)’으로 중국 시장이 빗장을 걸며 드라마 수출길은 한동안 좁아졌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생활은 세계적 동영상 플랫폼인 넷플릭스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고, 이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공급된 한국 드라마는 다시금 해외 팬들의 마음에 불을 댕겼다.

3차 드라마 한류의 중심지는 일본이었다. 일본 넷플릭스가 이달 중순 발표한 ‘2020 종합 톱10’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가 무려 5편 포함됐다. 배우 현빈·손예진 주연작인 ‘사랑의 불시착’이 1위를 차지했고, 박서준과 김다미가 출연한 ‘이태원 클라쓰’가 그 뒤를 이었다. 두 작품 외에도 김수현·서예지가 출연한 ‘사이코지만 괜찮아’(6위), 박보검·박소담의 ‘청춘기록’(8위) 등이 톱10 안에 포진했다.

한국어로 빌보드 정복… BTS 전성시대

④ BTS, 그래미의 벽을 넘다
그룹 BTS가 미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그래미어워즈의 높은 벽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지난달 진행된 제63회 그래미어워즈 후보작(자) 발표에서 ‘다이너마이트’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Best Pop Duo/Group Performance)’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K-팝 가수 중 최초다. 함께 후보에 오른 세계적 팝스타인 저스틴 비버·레이디 가가·아리아나 그란데·테일러 스위프트·두아 리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그래미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상식인 동시에 가장 콧대가 높기로 유명하다. 특히 백인 가수들에게 주로 상을 줘 ‘그래미 소 화이트’(Grammy so white·그래미는 백인들의 잔치다)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BTS는 이런 편견을 뚫고 주요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며 그들의 세계적인 위상을 재차 입증했다.

앞서 BTS는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뮤직어워즈, 아메리칸뮤직어워즈와 MTV뮤직어워즈 등에서 모두 수상했다. 지난 9월에는 ‘다이너마이트’로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100’에서 첫 정상에 올랐다. 이달 초에는 신곡 ‘라이프 고즈 온’이 재차 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 62년 차트 역사상 한국어로 부른 노래가 1위에 오른 건 처음이다. 그리고 BTS는 이제 내년 초 열리는 그래미어워즈를 정조준하고 있다.

현장에서 발로 뛴 체험담 주목받아

⑤ ‘당사자’가 성찰한 사회 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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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에선 특정 이슈나 사태의 한복판에 있는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낸 책들이 주목받았다.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지은입니다’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임계장 이야기’ ‘그냥, 사람’ ‘난치의 상상력’ 등이 이런 경향을 주도했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홀로 죽은 누군가의 집을 치우는 특수청소업체 대표가 고독사의 슬픈 이면을,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는 배달 기사가 플랫폼 노동의 어두운 그늘을 성찰한다. 이들 책은 감염병 확산, 빈부 격차 확대, 소수자에 대한 폭력 등 다양한 현안을 짚으며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책상머리가 아닌 현장에서 발로 뛴 체험담이 날카로운 통찰과 만났을 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증명한 사례들이기도 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자기고백적 에세이에 머문 경우가 많았던 과거와 달리 올해는 ‘경험’에 ‘학습’이 더해진 책이 연이어 나와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분석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들의 궤적

⑥ 여성 서사의 진화
최근 10만 부 판매를 돌파한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필두로 한국 문학계는 올해도 여성주의 서사, 즉 페미니즘 문학이 강세였다. ‘시선으로부터,’는 최근 문화일보 ‘올해의 책’에서도 전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출판·문학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 지난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이 정치권의 편 가르기 도구로 악용되는 동안, 소설 속 대사인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라는 문장이 SNS를 타고 확산되며 더욱 화제가 됐고 한동안 여성 연대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책은 ‘82년생 김지영’(2016), ‘현남 오빠에게’ (2017) 등이 견인한 여성 문학 붐을 잇고 있으며, 이는 다시 ‘뒤에 오는’ 여성 작가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국 문학이 여성주의 서사의 자장 안에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마찬가지로, 강화길의 ‘화이트 호스’, 김금희의 ‘복자에게’,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 황정은의 ‘연년세세’,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등도 여성 문학의 한 축을 이루며 올 한 해 주목받은 책들이다. 또한, ‘할머니’를 주제로 여러 여성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나의 할머니에게’와 이주여성을 소재로 한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단순한 반(反) 가부장제 서사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존재했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들의 궤적을 기록한다.

언택트 시대 온라인 콘텐츠로 돌파구

⑦ ‘온택트’로 간 공연·전시
공연계는 팬데믹으로 매출이 급감한 가운데 온라인·오프라인 공연을 병행하며 감염병 장기화에 대비했다. 뮤지컬 ‘모차르트!’를 시작으로 ‘베르테르’ ‘엑스칼리버’ 등이 유료 온라인 공연으로 관객과 만났고, ‘광염소나타’는 영화관에서 공연 실황을 생중계했다. 클래식은 대규모 인원이 필요한 오케스트라보다 실내악과 독주회에 집중한 가운데 가상현실(VR)·5세대(G) 기술을 활용한 ‘온택트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QR코드 시스템, 모바일 티켓 도입 등 감염병 확산에 발 빠르게 대처하며 ‘캣츠’와 같은 명작 뮤지컬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대에 올린 건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받는다.

미술계도 국공립 미술관을 중심으로 온라인 콘텐츠를 늘렸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 등 주요 아트페어가 온라인으로 열렸다. 오프라인 전시가 위축된 와중에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과 박래현 전 등이 주목받았다.

김인구·안진용·박동미·나윤석 기자, 장재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