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레터>분노·혐오·폭력의 시대…‘버려진 사람들’을 고민해야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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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1-02-1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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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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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새 책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김성준 옮김·책세상)을 접하고, 앞서 읽었던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데이비드 굿하트 지음·김경락 옮김·원더박스)을 떠올렸습니다. 굿하트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Brexit) 사태의 원인을 애니웨어(Anywhere)와 섬웨어(Somewhere)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애니웨어는 교육 수준이 높고 자율과 개방을 지지하며 급격한 사회 변화를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면 섬웨어는 교육 수준이 낮고 뿌리와 안정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그동안 공론장에서 소외됐던 이들 ‘버려진 사람들’이 극단주의라는 반동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게 굿하트의 진단입니다.

프레이저는 이번 책에서 미국판 섬웨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을 낳은 과정을 설명하는데요, ‘진보적 신자유주의(Progressive Neoliberalism)’라는 독특한 분석 틀을 제시합니다. 한국의 ‘강남 좌파’처럼 형용모순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프레이저는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미국 정치를 지배했던,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세력의 실재하는 강력한 동맹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세력이란 페미니즘·반인종주의·다문화주의·환경주의 등을 이끄는 “자유주의적 분파”와 월스트리트·실리콘밸리·할리우드로 상징되는 “가장 역동적이고 부유한 부문”입니다.

사회·문화는 진보, 경제는 보수(능력주의·자유주의) 성향인 ‘진보적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블록은 민주당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 정부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007~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 등 경고음도 무시됐습니다. 약탈적 대출 증가, 제조업 파괴, 노동조합 약화,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 양산 등 금융 자본주의의 폐해에 지친 ‘버려진 사람들’은 결국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라는 깜짝 놀랄 대안을 선택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미 트럼프 정부가 간판을 내렸다고 해서 프레이저의 진단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사람들, 그리고 정반대 진영에서 극좌 성향으로 치닫는 사람들은 여전히 ‘버려진 채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프레이저는 “(과거 민주당의) ‘진보적 신자유주의’나 (트럼프의) ‘초반동적 신자유주의’ 중 어느 쪽도 가까운 미래에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할 적합한 후보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자기 꼬리를 먹는 호랑이와도 같은” 금융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공백 상태에서는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출현한다”는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에 주목합니다. 대표적인 병적인 증상은 “분노에서 비롯돼 희생양 만들기로 표출되는 혐오, 연대의식이 사라진 골육상쟁의 세계에서의 폭력 분출”입니다. 차기 대선을 1년여 앞둔 한국 사회 역시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버려져’ 있고, 극단주의가 횡행합니다. 통합과 상생의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인이라면 이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해법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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