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색·세밀 묘사… 명암·원근법 없는 환상적 책 그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성호 ‘레트로토피아’ 시리즈
박여숙 화랑서 25일부터 선봬

김성호(41)의 책 그림은 색감이 눈부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원색의 강렬함이 잦아들며 은은한 느낌이 찾아든다. 모순의 조형미학이라고 할까. 정교한 묘사가 극사실적으로 보이지만, 명암·원근법이 없어 환상성을 자아낸다.

김성호가 신작 ‘레트로토피아(Retrotopia) 시리즈’(사진)를 선보이는 개인전을 연다. 오는 25일부터 서울의 박여숙 화랑에서다.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로 회귀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복고의 허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상향을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전이를 지향한다.

이번 신작들은 작가의 대표작인 ‘볼륨 타워(Volume Tower)’의 연장선에 있다. 볼륨 타워는 무한대의 정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쌓아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이 작품들 속에서 책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다. 인류가 만든 가공의 세계를 의미한다. 작가는 가상의 책을 그린 그림을 통해 회화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그림의 본질은 허상의 재현 혹은 가공의 진실이 아닌가.

평론가 정준모는 “김성호가 입체감을 배제한 평면 회화를 통해 그림의 역설(逆說)을 증명하려 한다”고 봤다. 그 역설을 어루만지며 세상의 위선과 모순을 성찰한다면 일급 관객일 것이다.

정준모는 김성호 그림을 보며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세밀함이 뛰어나 귀하다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려시대 한국 미술의 특징을 상찬하는 말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 작품들은 세밀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동시에 장식적인 미감이 두드러진다. 이는 조선시대 책가도(冊架圖) 혹은 민화(民畵)풍을 끌어들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양화가인 김성호가 전통미술 기법을 아우르며 작업의 폭을 넓힌 셈이다. 이게 독창적이고 새로운 미학으로 나아갈지, 어설픈 차용으로 끝날지는 모를 일이다. 이번 전시 작품으로만 보면 전자의 희망이 커 보인다. 전시는 내달 25일까지.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