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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Deep Read 게재 일자 : 2021년 02월 23일(火)
지적 오만, 파벌과 결합할 때 극대화… 음모론 선동으로 민주주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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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를 막론하고 ‘파벌적 오만’은 음모론을 생산하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 우파 진영의 범국민투쟁본부 회원들이 지난해 2월 광화문에서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국민대회’ 집회를 열고 있고(왼쪽), 그에 앞서 좌파 단체들이 2019년 11월 대검 청사 인근에서 ‘검찰개혁·조국수호’ 집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 음모론·가짜뉴스 작동원리

우리 편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노잇올’ 사회…의도적 합리화와 암묵적 편견으로 집단적 확증편향 만들어
정보·SNS 과잉공급 속 ‘지식상품’보다 ‘신념상품’ 선호… ‘세월호 고의 침몰설’ 등 음모론 확산·선동 길 터


지난달 22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재단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1년여 전 검찰이 재단과 자신의 금융거래 정보를 열람하는 등 불법사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던 것에 대해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면서 검찰 관계자와 재단 후원회원, 시민 등에게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고백을 보자.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습니다.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습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불투명한 상황을 오직 한 방향으로만 해석해, 입증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고 충분한 사실의 근거를 갖추지 못한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스스로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진원지 노릇을 했다고 시인한 셈이다.

유 이사장의 사과는 차기 대통령선거를 약 1년 앞둔 시점에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다시 한 번 화두로 끌어 올렸다. 여권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인사이자 대표적 진보 이데올로그인 그가 어쩌다 이런 고백을 하는 처지가 됐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작동원리를 알아야 한다. 인지과학과 심리학·사회학·철학·정치학 등을 망라한 연구 결과들은 인간 본성은 물론 기술 발전, 심지어 민주주의에도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씨앗이 산재해 있음을 보여준다.

◇파벌적 인지편향과 오만함

지난 2016년 말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그해의 단어로 ‘포스트트루스(post-truth·탈진실)’를 선정한 이래로 그 현상의 원인과 양상, 폐해 등을 분석하는 작업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최근에도 사람들이 쉽게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생산자 혹은 소비자가 되게 하는 메커니즘,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룬 책들의 출간이 이어지고 있다.

악의 출발점은 한계투성이로서의 인간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보여주듯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지적·도덕적 오만함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몽테뉴도 인간이 일종의 전염병, 즉 ‘자신이 뭔가를 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봤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김홍표 옮김·올재클래식스)에서 “인간의 지성은 자신이 믿고 있는 부분에 반대하는 어떤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라면 관대함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의 이런 오만함은 ‘의도적 합리화’와 ‘암묵적 편견’으로 지탱된다. 마이클 린치 미국 코네티컷대 철학과 교수는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성원 옮김·메디치)에서 현재의 미국을 ‘노잇올(know it all) 사회’라고 진단한다.

문제는 인간이 쉽게 인지편향에 빠지는 존재라는 데 있다.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 솔로몬 애시의 ‘집단동조 이론’, 피터 웨이슨의 ‘확증편향 이론’ 등 사회심리학 고전 이론들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서로 얽혀 있는 오만함과 인지편향은 파벌과 집단의 형태일 때 더 극대화된다. 파벌·집단과 결합한 확신은 집단적 정체성의 문제가 되고, 그 결과 확신에 대한 공격은 곧 ‘우리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페스팅거와 그 동료들은 ‘예언이 끝났을 때’(김승진 옮김·이후)에서 인지편향에 빠진 개인이 동일 집단 속에 노출될 경우 명명백백한 반증 사례를 접하더라도 기존 확신을 바꾸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정보 과잉과 가짜뉴스

인터넷과 SNS의 등장이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증폭시킨 측면이 있다. 이는 정보시장의 변화와 연관된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정보 공급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처음 열렸을 때만 해도 이런 인지 시장의 공급 혁명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론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제랄드 브로네르 프랑스 디드로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김수진 옮김·책세상)에서 “정보의 과잉 공급은 역효과를 낳았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에 따르면, 참과 거짓을 가리기 어려운 정보들이 넘쳐남에 따라 인지 시장에서 객관적 진실을 담은 ‘지식 상품’이 근거 없는 직관에 기반한 ‘신념 상품’과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렇다 할 준비 없이 그럴듯한 논리로 짜인 방대한 ‘신념 상품’을 접하면 그에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이 동요하는 ‘ 포티언(Fortian) 효과 ’가 나타난다. ‘5·18 광주 북한군 투입설’ ‘세월호 고의 침몰설’ 등 음모론이 이에 해당한다. 설상가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싼 비용으로 정신적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인지적 구두쇠’ 경향,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보만 취하는 ‘확증 편향’ 경향이 겹친다. 이런 환경에서는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단순명쾌한 데다 감춰져 있던 뭔가를 까발리는 듯한 ‘폭로 효과’까지 동반하는 비과학·유사과학의 선동이 진실을 밀어낸다.

인터넷과 SNS의 작동 원리는 인간을 더 진실에서 멀어지게 한다. 인터넷 검색을 이용할 때 개인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맞춰 걸러진 편향된 정보, 즉 ‘필터 버블(filter bubble)’에 갇힌다. SNS 알고리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더욱이 관계 맺기와 관계 끊기가 한순간의 클릭으로 이뤄지는 SNS에선 신념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불편하지 않은 얘기만 주고받는 ‘반향실(echo chamber) 효과’가 나타난다. 이론이 끼어들 여지는 없고, 확증편향은 더 강화된다.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브로네르 교수는 알 권리, 말할 권리, 결정할 권리라는 참여민주주의의 세 가지 요체가 사람을 잘 속게 하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역설을 지적했다.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흔히 ‘의심할 권리’를 내세워 ‘무지에 근거한 논증’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곤 한다. 가령 ‘A가 위험하다’는 근거를 내놓는 게 아니라 ‘A가 위험하지 않음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여기에 ‘재앙이 발생했을 땐 이미 늦다’는 식의 ‘사전예방주의(precautionism)’가 겹칠 경우, 광우병 괴담과 같은 음모론 확산으로 이어진다. 브로네르 교수는 “의심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은 권리의 남용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며 “아무 제약 없이 행사되는 자유보다 자유를 말살하는 것은 없다”고 일갈했다.

왜곡된 인지 시장에서 민주화와 합리성은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양성이 능력을 능가한다’는 스콧 페이지의 원칙이 먹히지 않는 사례가 속출하는 게 대표적이다. 브로네르 교수는 “인지 편향들은 결코 숙의로 인해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특히 공적 발언에 능숙한 개인들이 이런 편향들을 투쟁적 논거로 이어나가서 인지적 선동주의를 실천하는 경우가 그렇다”고 말한다.

문화부 차장

■ 세줄 요약

파벌적 인지편향과 오만함 : 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음모론의 씨앗이 산재해 있음. 인간의 오만함과 인지편향은 ‘의도적 합리화’와 ‘암묵적 편견’으로 지탱되고, 파벌·집단과 결합할 때 더 극단화하며 결국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진원이 됨.

정보 과잉과 가짜뉴스 : 인터넷과 SNS 발전은 객관적 진실을 담은 ‘지식 상품’보다 직관에 기반한 ‘신념 상품’을 취하게 함. 이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처럼 신념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다른 견해는 끼어들 여지가 없게 하는 ‘확증 편향’을 강화.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의심할 권리’를 내세워 ‘무지에 근거한 논증’으로 음모론을 확산. ‘광우병 괴담’ 등이 대표적 사례. 기술·민주주의 발전에도 불구, 누구라도 음모론·가짜뉴스의 유포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음.


■ 용어 설명

‘노잇올(know it all)’이란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비꼬는 표현. 마이클 린치 교수는 상대의 정치적 관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미국을 ‘노잇올 사회’로 칭함.

‘포티언 효과’란 여러 겹으로 이뤄진 밀푀유처럼 방대한 논거를 동원해 가능성이 희박한 주장을 옹호했던 미국인 찰스 포트의 이름에서 유래한 개념.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방법으로 활용됨.
e-mail 오남석 기자 / 문화부 / 차장 오남석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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