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 인터뷰>아카데미까지 노리는 ‘옛날 여배우’…윤여정 “내가 말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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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로 27관왕 - 윤여정

특유의 유머와 거침없는 말
인생 저무는 시점 다시 만개

美 각종 영화제 여우조연상
“미국은 땅 넓으니 상도 많아”

임상수·홍상수 비교 부탁에
“林은 돈을 주고… 洪은 안줘”

“정이삭 감독과 해외스태프
우리집 찾아와 큰절해 놀라”

“‘미국 땅이 넓으니 상도 많구나’ 싶었죠.”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미국 각종 영화제 여우조연상 27관왕에 오른 것에 대한 배우 윤여정(74)의 소감이다. 이 영화의 성과를 두고 대한민국은 떠들썩한데, 지난 2월 말 캐나다 밴쿠버에서 작품을 촬영하며 화상 인터뷰로 만난 윤여정은 “상패는 1개만 받아 아직 실감을 못 하고 있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특유의 유머와 거침없는 언변, 그리고 김기영·임상수·홍상수 감독, 김수현·노희경 작가 등 소위 대가(大家)들이 기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연기력은 인생이 저무는 시점이라는 60∼70대에 오히려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마력(魔力)이다. 따지고 보면 최근 ‘미나리’의 성공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로또’가 아니라,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칸국제영화제를 비롯, 유수의 시상식을 섭렵한 그의 또 다른 경유지일지 모른다.

◇美 홀렸던 봉준호의 유머, 이번엔 윤여정이다

예능계 ‘미다스의 손’인 나영석 PD는 왜 윤여정을 쓸까? 그리고 왜 대중은 tvN 예능 ‘윤식당’에 이어 ‘윤스테이’에 매료됐을까? 그의 단단한 영어 실력은 조미료일 뿐, 진짜 매력은 ‘꼰대’ 기질 없는 솔직함과 유머다.

‘미나리’의 화상 간담회에서도 윤여정의 유머는 빛을 발했다. 먼저 인사를 전해달라는 주문에 그는 “나이순(順)이군요”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다른 이들이 대동소이한 에피소드를 내놓자 대뜸 “저는 다른 얘기해줄게요”라며 미국에서 ‘미나리’를 촬영하는 동안 숙소에서 밥해 먹고 지냈던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미국 매체 인디와이어와 나눈 인터뷰에서 ‘미나리’의 화재 장면을 설명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꽃이 내 얼굴을 향했지만 감독이 ‘컷’을 하지 않아 계속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탈 뻔했다. 바비큐처럼. 코리안 바비큐!”

지난해 초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는 또 어땠나.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발휘했다. “‘미나리’는 독립영화라서 출연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아주 많이 고생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느라 우린 한집에 살았고 그렇게 가족이 됐다.”

수차례 윤여정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하녀’와 ‘돈의 맛’으로 호흡을 맞춘 임상수 감독과 홍상수 감독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임상수는 돈을 주고, 홍상수는 돈을 안 줘.” 상업영화 감독과 저예산 독립영화 감독의 스타일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비교할 순 없었다. 듣던 모든 이의 웃음이 ‘빵’ 터졌다.

◇나이에 묻히지 않다

윤여정은 인터뷰 도중 나이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여배우의 나이를 묻는 것은 때론 실례일 텐데 윤여정은 항상 먼저 말을 꺼낸다.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도 스스로 “old-time actress”(옛날 여배우)라고 칭했다.

그는 ‘미나리’ 신드롬의 서막을 연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 받을 당시를 떠올리며 “나는 그냥 나이 많은 노배우이지 않나.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뭘 이뤄내는 걸 보면 장하다.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 싶으면 애국심이 폭발한다”며 후배들에게 공을 돌렸다.

나이 듦에 연연하지 않는 윤여정은 항상 엄마의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식구(食口)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는 윤여정이 ‘미나리’ 속 할머니 순자의 내리사랑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건 우연이 아니다.

‘미나리’ 촬영이 끝난 후 정 감독을 비롯한 해외 스태프까지 윤여정의 이런 배려에 한국식으로 큰절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윤여정은 “정 감독이 호주 사람을 비롯해 크루(crew)를 집에 데려왔다. 큰절을 해서 너무 놀랐다”며 “저는 그 순간이 제일 좋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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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윤여정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아요.” ‘미나리’ 속 손자 데이비드(앨런 김)는 순자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쿠키를 구워주지도 않고, 밤새 오줌을 싼 자신을 감싸주기는커녕 ‘페니스 브로큰’이라고 놀리는 순자가 못마땅한 탓이다.

그런데 이 대사는 윤여정의 연기 인생에 대입해도 꼭 들어맞는다. 1971년 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로 데뷔해 시체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탈 때만 해도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결혼과 도미로 13년간 경력이 중단됐다. 이혼 후 한국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생계를 위한 연기에 매달렸다. 그러던 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3년,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당시 윤여정은 바람난 시어머니 역을 맡아 파격 노출 연기에 도전했다. “그때 집수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나 역시 꺼려졌지만, 돈이 급해 수락했다. 배우는 돈 필요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

이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스타일을 구축한 그에게 다소 기괴한 캐릭터들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재벌집 주인 머리꼭대기에 앉아 있는 늙은 하녀 병식(하녀)과 젊은 비서와 몸을 섞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재벌가 안주인 금옥(돈의 맛)을 거쳐 노인 성매매를 소재로 다룬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소위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했다.

그런 면에서 ‘미나리’ 속 순자를 보면 오히려 이질감을 느낄 법하다. 하지만 손자의 음료수를 뺏어 먹고, 함께 고스톱을 치며 장난을 거는 순자의 모습은 기존 한국 할머니들의 그것과는 다소 다르다. 윤여정은 “정 감독에게 ‘할머니를 흉내 내야 하나’라고 하니 ‘그럴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해서 속으로 A+를 줬다. 자유를 얻어 편하게 연기했다”며 “순자가 밤을 입으로 씹어서 손자에게 건네는 것과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자는 장면도 내가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말년이 좋다”

2018년 1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개봉 당시 윤여정과 긴 시간 인터뷰를 나눴다. 그날은 운 좋게 소그룹으로 만나 속내까지 주고받을 수 있었다. “‘윤식당’이 내 대표작”이라고 너스레를 떤 윤여정은 “내가 사주를 봤는데 ‘말년이 좋다’더라. 위안을 얻었는데 진짜 나아지더라. 얼마나 좋을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화녀’ 때만 해도 내가 잘하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은 거였다. 그땐 예뻐야 연기할 수 있었는데 김 감독님을 만나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며 “나는 타고난 게 너무 없어서 항상 열심히 살았는데 행운이 많이 따라왔다. 이제 겨우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나이가 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를 촬영 중인 윤여정. 말년이 좋은 그의 다음 행보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린다. 그는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두 가지가 진행되고 있어 거의 죽을 지경이다. 한 가지는 한국에서 진행되고 다른 하나는 아닌데, 말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인디와이어는 직구를 던졌다. “혹시 봉준호 감독과 함께하는가?” 윤여정은 이에 “곧 알게 되겠지”(We’ll see)라고 여운을 남겼다.

인터뷰 =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