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바른소리 했던 한국출판 1세대… 겸손한 자세로 큰 자취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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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일(1940∼2021)

석양에 먼 길 걸어가는 도중 동행(同行)을 잃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다. 비가 내리던 지난 3월 1일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별세했다는 뜻밖의 부음을 접했다.

10여 일 전 아산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고 퇴원해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갑작스러운 비보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행하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인품 때문이었다. 2010년 언젠가 현대문학사가 기획한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에 들어갈 ‘김이석 소설 선집’에 관한 비평 작업을 나에게 부탁했다.

이 프로젝트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옛날 나눴던 친분 때문에 작고한 소설가에 대해 보인 그의 애정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깊이 알게 돼 2019년 그의 출판사에서 산문집 ‘묘지 위의 태양’을 출간했고 그 후 가끔 세상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고 사장은 한국출판계의 1세대였지만 진보진영 일각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결코 구시대의 출판인이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하는’ 우직한 출판인이었다. 그는 역사의 태풍 속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남은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한국현대사의 산증인이었고, 스스로 글을 쓰는 소설가였다.

1951년 그가 열 살 때 6·25전쟁으로 아버지는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고 그는 외갓집이 있는 경기 화성으로 피란을 가다 중공군 포격에 어머니와 두 동생의 죽음을 눈으로 봐야만 했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전쟁고아가 됐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서점의 점원으로 덕수상고 담벼락에서 가방에 헌책을 넣고 서서 팔다가 당대의 소설가이자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를 만났다. 그것이 계기가 돼 청계천에서 천막서점을 열었고, 16세 때 동서출판사를 차렸다.

이후 역사소설 ‘대망(大望)’과 ‘빨강머리 앤’ 등으로 대박을 쳤고, ‘한국대백과사전(31권)’을 출간했으나 KBS의 악의적인 보도와 포털 사이트의 무단 인터넷 서비스로 무참히 파산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다른 노력으로 출판사를 지켜 와 올해 창립 65주년을 맞았으나 애석하게도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백상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그의 출판사는 5000여 종의 책을 출간하며 유서 깊은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한때 크게 성공했던 ‘그레이트 북스: 세계문학전집(31권)’ 기획은 현재 주요 출판사마다 다퉈 출판하고 있는 세계문학전집 출판의 디딤돌이 됐다.

스스로 작가가 돼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와 전작소설 ‘장진호: 불과 얼음 17일 전쟁’을 펴내기도 했다. 또한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김동리, 황순원, 김성한, 선우휘 등 대가들의 도움으로 10년 동안 운영하다 조선일보에 넘겼다.

그가 장진호 전투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쓴 것은 전란 속에서 살아남은 생의 역정에서 얻은 본인의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전쟁고아로서 출판계의 기린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결코 인색하지 않고 한없이 겸손했다. 부인은 화가이고, 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중앙대 교수로 있다. 딸은 연세대를 나와 독일 쾰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루돌프 연구소장으로 있지만 좀처럼 누구에게도 언급하거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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