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원의 지식카페>실용 - 미학 사이 모호한 매력…그 안에 심어놓은 우아한 ‘프랑스의 美’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도쿄에 위치한 필립 스탁을 상징하는 건물 ‘아사히 비어홀’위엔 소뿔 모양의 노란색 조형물이 얹혀 있다.

■ 최경원의 세상을 바꾼 디자인 - (4) 여전한 톱클래스, 필립 스탁

필요한 기능·아름다운 형태·은유 없지만… 모나리자 미소처럼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력 불러일으켜

미테랑의 의자 ‘리처드 3세’·초현실적 시계 ‘웨일’ 유명… 즙 짜는 도구 ‘주시 살리프’로 스타덤 1990년대 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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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역사가 돼버린 감도 있지만 1990년대는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의 시대였다.

당시에 그를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만들어 줬던 것은 세 개의 긴 다리와 원추 모양의 몸체로 이뤄진 레몬즙 짜는 도구 ‘주시 살리프(Jucy Salif·1990년)’였다. 둥근 쐐기 같은 알루미늄 덩어리에 가느다란 선적 구조의 다리가 붙어 있는 모양이 세상에 드러나자마자 열화와 같은 인기를 얻었다. 첨단기술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기능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오징어 같기도 하고 곤충 같기도 한 모양이 뭐 그리 매력적이었는지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엎으면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등극했다. 디자이너 스탁은 당연히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 팝스타에 육박하는 인기를 얻었다. 그렇게 1990년대는 스탁의 낭만적인 디자인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그의 디자인에는 분명한 부분이 별로 없었다.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진 것도 아니고, 형태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은유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런 모든 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런 몽롱한 디자인은 이전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모호함이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채우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그런 매력적인 모호함 안쪽에 항상 우아하고 격조 높은 프랑스의 아름다움을 심어 놨다.

주시 살리프가 나오기 훨씬 이전에 디자인한 의자 ‘리처드 3세(1985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483년부터 1485년까지 영국을 통치했던 리처드 3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이 의자는 묵직한 볼륨감을 갖고 있어 이름처럼 고상하고 귀족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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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아파트에 넣기 위해 디자인된 것인데, 의자를 앞에서만 보면 스탁이 디자인했다기보다는 옛날 의자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의자의 뒤쪽은 원기둥 모양의 다리가 달랑 하나만 만들어져 있고 형태의 볼륨감도 대폭 축소돼 있다. 앞쪽에서는 고전주의적 의자의 웅장함이 잘 표현돼 있는데, 보이지 않는 뒤쪽은 다리와 볼륨감을 최소화시켜 놓은 것이다. 덕분에 이 의자는 지극히 고급스러운 고전주의적 이미지와 현대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 의자에서 표현됐던 고전주의적 접근은 플라스틱 의자 ‘로드 요(Lord yo·1994년)’에서 더 발전되고 있다. 등받이와 팔걸이로 이어지는 고전주의적 곡면은 이 의자가 베르사유 궁에서 가져온 듯한 느낌을 준다. 직선이 하나도 없는 형태와 흐르는 곡면들이 유기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지는 그 리듬감은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장식을 현대적으로 압축해 놓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의자 전체에 흐르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면들은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나 항공기와 매우 닮아 있다. 복고의 전략 속에서 현대성을 이중적으로 구현해 놓은 그의 디자인 솜씨는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스탁의 우아한 3차원 곡면이 초현실적으로 잘 표현된 것은 벽걸이 시계 ‘웨일(Whale·1989년)’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시침과 분침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됐다. 그래서 넓은 곡면의 시침, 분침의 모양은 고래 꼬리 같은 느낌도 들고, 대양을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의 유연한 몸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침과 분침의 움직임이 마치 어미 고래와 자식 고래가 넓은 대양을 가로지르며 우아하게 헤엄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아마 스탁은 거대한 시간 속을 헤엄치는 벽시계를 디자인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스탁의 디자인 중에는 건축도 있다. 일본 도쿄(東京)에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소뿔 모양의 노란색 조형물이 얹혀 있는 ‘아사히 비어홀(1997년)’ 건물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조각 작품처럼 보이는데, 스탁의 조형적 개성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렇게 매력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1990년대를 이끌어가던 스탁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빠르게 내리막을 탔다. 은퇴 이야기도 솔솔 나왔고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자하 하디드나 프랭크 게리 같은 건축가들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이 일반화되다 보니 스탁의 얌전한 곡면이 눈에 잘 띄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아울러 세간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버블 클럽 암체어(Bubble Club Armchair·2000년)’ 같은 디자인을 내놓으면서 특유의 세련된 전통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앞의 로드 요 의자가 여성적인 귀족미를 보여준다면 이 의자는 남성적인 고전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전의 디자인 포스에 비해서는 많이 누그러졌다. 그렇게 정체기를 보내다가 2010년 전후로 다시 열정의 온도를 높여갔다.

‘마스터 스툴(Master Stool·2010년)’은 그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는데, 선배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명작 의자들을 재해석해 하나의 의자로 만들었다는 아이디어부터가 역시 스탁이라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이 의자는 유명한 아르네 야콥센의 ‘7시리즈’, 에로 사리넨의 ‘튤립 암체어’, 찰스 임스의 ‘에펠 체어’의 형태를 하나로 융합해 디자인해 시선을 끌었다. 나오자마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매액을 올리기도 했다.

악소르 사를 위한 ‘수전 디자인(Axor Starck Ⅴ·2014년)’은 그의 조형적 솜씨가 한층 더 진화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일단 수도꼭지가 투명해 수돗물이 샘물처럼 솟아 나오는 것을 보는 듯한 독특한 체험을 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나오는 물이 너무나 시원하고 깨끗해 보인다. 투명한 수도꼭지의 모양은 이전의 스타일과는 조금 다른 유기적인 모양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어 스탁의 포용력, 시대에 대한 적응력을 엿볼 수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어렸을 때 삼촌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숙모가 앉아 뜨개질하던 의자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엉클 짐 암체어(Uncle Jim Armchair·2015년)’는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의 디자인을 새로운 재료와 모양으로 재해석해 주목받았다. 소재는 첨단인데 전체적인 실루엣은 친근하고 오래된 느낌이 우러난다. 그는 이 의자에서 투명하고 물성이 강한 폴리카보네이트 계통의 플라스틱을 활용해 투명한 의자를 시도하기도 했다. 어디에 놓여 있든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존재에 대한 매우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스탁은 이전의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점점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면서 새로운 디자인을 많이 내놓고 있다. 그의 전성기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디자인 전성기는 다시 시작돼 계속 꽃을 피워 나갈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다음 디자인을 궁금하게 만드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 1949년 프랑스 파리 출생

- 1968년 파리 에콜니심드 카몽도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다 1969년 중퇴하고 독학으로 디자인 공부

- 1970년대 말 파리 나이트클럽 실내장식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

- 1979년 스탁 프로덕트 설립

- 1982년 엘리제 궁 안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 사저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음. 이후로 인테리어를 비롯한 건축, 가구, 생활소품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디자인 활동

- 199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