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정략따라 다른 잣대… 진영싸움 소재로 전락한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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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 민주주의 토대, 표현의 자유

1987년 이전엔 검열·통제… 민주화 이후엔 창작의 자유 침해 논란 빈발
2000년대 진영갈등 격화되며 언론·출판 자유 20년만에 다시 쟁점화‘퇴행적’
가치 충돌, 야만적 국가일수록 힘·폭력으로… 선진국일수록 법·제도로 해결
시대·상황 맞는 헌법정신 해석 필요… 정치권이 균형점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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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0일 오전 탈북민 출신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가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에 출두했다. 박 대표는 지난달 25~29일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북한을 향해 전단 50만 장과 소책자 500권, 1달러짜리 미화 5000장을 보낸 혐의(남북관계발전법 위반)로 수사받아 왔다. 박 대표는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 자유민주주의, 세계인권선언을 북한 주민에게 알리는 것이 잘못이냐”고 항변했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남북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2. 같은 날 오후 진보 성향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행동’은 국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10만 국민청원 운동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진보적 사상과 민중 지향의 정책을 ‘불온한 것’으로 간주하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차단하는 반인권 악법”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이 법이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화해와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을 ‘간첩행위’로 만들어 처벌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 펼쳐진 두 장면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 난제를 짊어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보수와 진보 진영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유’라는 헌법 정신을 구현하라고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헌법적 가치를 놓고 충돌이 빚어질 때 국민을 대신해 토론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게 정치의 몫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표현의 자유’마저 진영 싸움의 소재로 전락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표현의 자유’ 논란, 검열에서 진영 싸움으로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주주의는 물론 과학의 진보도 ‘표현의 자유’의 역사와 함께했다. 다만 시대에 따라 주된 논쟁의 대상은 달랐다. 한국에서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언론·출판, 집회·시위, 학문, 예술 창작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검열과 통제가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쓰거나 창작물을 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필화(筆禍)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거나 아예 언론사를 없애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금서와 금지곡도 학문과 창작의 자유를 질식시킬 지경이었다. 민주화 이후 1990년대에는 예술 창작의 자유 침해 논란이 주를 이뤘다. 소설 ‘즐거운 사라(마광수 지음)’와 ‘내게 거짓말을 해봐(장정일 지음)’, 만화 ‘천국의 신화(이현세 지음)’ 등을 외설적이라며 법적 잣대로 단죄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시대유감’ 가사 검열 사태도 벌어졌다.

일명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 논란이 보여주듯, 최근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논란은 대부분 정치적 공방과 진영 싸움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는 10년마다 정권이 교체되며 진영 갈등이 격화된 2000년대 들어 두드러진다. 진영 싸움이 정치뿐 아니라 모든 영역을 잠식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 침해 논란이 빈발했다. 자유권의 기본에 해당하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민주화 이후 약 20년 동안 주요 논란거리로 떠오르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는 퇴행적인 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정부가 언론 탄압 논란 속에 정부기관 기자실 폐쇄를 강행했다. 이명박 정부 초반인 2009년 초에는 이른바 ‘미네르바 사건’이 터졌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박대성 씨를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에는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서울지국장이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 관련 칼럼을 썼다 불구속 기소됐다. 문재인 정부하인 2020년에는 대북 전단을 살포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의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이 제1야당인 국민의힘의 반대 속에 국회에서 강행 처리됐다. 이들은 모두 정부와 여당의 과잉 대응 논란이 일었던 사안으로, 이를 둘러싸고 정치권뿐 아니라 시민들까지도 충돌했다. 최근에는 일부 여당 의원이 ‘가짜뉴스’ 단속을 명분으로 내걸고 언론사도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에 대해 미국 등 국제 사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한층 격해지는 양상이다. 미 의회 인권위원회가 지난달 이 법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고, 국무부도 ‘2020 국제 종교자유 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를 비롯한 유엔 특별보고관들은 한국 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이 법의 표현이 모호하며 과잉처벌 금지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을 검찰에 고발한 박 대표는 20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미국 정부는 예산까지 들여 북한 인민에게 자유 세계 정보를 들여보내는 것을 지원하는데, 미국의 혈맹이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유하는 대한민국이 이를 범죄시하는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진영 싸움의 단골 소재인 역사 기술과 해석을 놓고도 ‘표현의 자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014년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피소돼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20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이 국민의힘의 반대 속에 강행 처리됐다. 이달 초에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국내에서 출간돼 논란이 일었다.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이 김 전 주석의 항일 투쟁 등을 미화해 북한 주민에 대한 김일성 우상화에 쓰인 책을 원본 그대로 출간하자 일부 시민단체가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법 정신에 대한 ‘건설적 해석 논쟁’ 절실 = ‘표현의 자유’ 논란은 대부분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충돌하는 데서 발생한다. 포기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데, 균형점은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1987년 이후 헌법이 개정된 적이 없는데도 ‘세기와 더불어’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 1994년 도서출판 가서원이 이 책을 출간하려 했을 때에는 출판사와 인쇄소가 압수수색되고 대표가 구속됐다. 17년 만에 법원이 다른 판단을 내린 데에는 보수 야당인 국민의힘에서조차 “누가 김일성 우상화에 속겠느냐”며 출간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하태경 의원)이 나오는 등 달라진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금서나 금지곡이 이제 옛날이야기 소재가 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전문가들은 헌법 정신을 시대와 상황에 맞게 해석하기 위해 정치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권이 진영 싸움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균형점을 찾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효원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야만적인 국가일수록 힘과 폭력으로, 선진국일수록 법과 제도로 이를 해결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국 가치 충돌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1차 책임은 법을 만드는 국회에 있다”고 강조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여당이 주도해 처리한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과 ‘5·18 왜곡 처벌법’은 모두 공공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자유권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에 국가가 개입하고 제한을 가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는 대목에서 진정한 공익이란 무엇인지, 과연 공익과 기본권이 별개일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남석·최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