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에드바르 그리그
‘페르귄트’소재로 희곡 쓴 입센
연극공연의 부수음악 작곡 부탁
반세기에 달하는 시간적 배경
미국·阿 넘나드는 공간적 광활
소박한 소품·민족적 가곡 짓던
‘북유럽의 쇼팽’, 새 장르 도전
1874년 1월, 노르웨이 국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1843∼1907)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독일의 드레스덴에 머무르고 있던 노르웨이의 대문호, 그 유명한 희곡 ‘인형의 집’의 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1828∼1906)에게서 온 편지였다.
내용인즉슨, 자신이 노르웨이의 민담(民譚) ‘페르 귄트’를 소재로 쓴 희곡이 하나 있는데, 그 작품의 연극 공연에 곁들일 부수음악(Incidental music·연극 등에 붙이는 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것이었다. 존경하는 대문호의 작곡 청탁이었지만 그리그는 선뜻 승낙할 수가 없었다. 희곡의 내용이 지극히 서정성을 중시하는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고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의 작곡은 문학적 해석력까지 더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그는 완곡히 거절했으나 입센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의 편지에서 “친애하는 그리그여, 이 작품은 레제드라마(Lesedrama·독서용 희곡)로 쓰인 작품이라네. 원래는 무대에 올릴 생각이 아니었지. 우리 조국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위해선 자네의 천재적인 악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네”라며 설득을 이어나갔다.
대작가의 열렬한 구애에 그리그는 희곡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망과 몽상을 좇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 다니며 방탕한 나날을 보내던 페르 귄트가 늙어서 배에 금을 가득 싣고 귀향길에 올랐으나 풍랑을 만나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 아내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희곡의 줄거리였다.
희곡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리그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반세기에 달하는 시간적 배경과 노르웨이는 물론이고 모로코, 이집트, 미국에 이르는 광활한 공간적 배경까지 모두 음악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그는 이미 노르웨이 최고의 작곡가였다. 그간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민족적 선율의 가곡들을 선보이며 ‘북유럽의 쇼팽’이란 찬사를 받아왔다. 새로운 장르와 스타일에 대한 도전은 힘겹게 쌓아온 평판을 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리그는 이미 입센의 작품에, 조국의 이야기에 매료돼 있었고 작은 연극 무대에서 도저히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작품상의 공백을 음악으로 메워갔다. 작곡에 착수한 이듬해인 1875년 가을, ‘페르 귄트’ 부수음악은 완성됐다. 연극은 그 이듬해 2월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 왕립극장)에서 초연됐다.
우리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직관으로, 때로는 숙고를 거쳐 이득이 되거나 더 좋은 결과를 낳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해 자신만의 기준을 쌓아간다. 선택의 순간, ‘페르 귄트’의 이야기와 자신만의 기준을 과감히 깨부순 그리그의 담대함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오늘의 추천곡
- ‘페르 귄트’ 제1 모음곡
‘페르 귄트’ 부수음악은 워낙 작품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1888년과 1893년에 각각 4곡으로 구성된 두 개의 모음곡(Op.46, Op.55)으로 편집한다.
극의 전개를 따르지는 않으나 모음곡 구성만으로도 음악적 완성도가 높다. 제1곡 아침의 기분(Morning Mood)은 ‘페르 귄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페르 귄트가 모로코에서 맞는 아침 일출의 기분을 묘사한 음악이다. 아침 해가 뜨는 듯 온화한 에너지로 가득 찬 작품.
유명한 애니메이션 ‘가제트 형사’에 삽입돼 역시 익숙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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