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만마디 대신하는 한마디

황주리 화가

이 사막 같은 외로운 세상에서
만마디 대신하는 한마디 그리워

지금도 가자·미얀마선 피바람
예수·부처가 보면 뭐라 그럴까

수고했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그런 말 해줄 한 사람이 그리워

제목에 끌려서, 중국·홍콩 합작 영화 ‘만 마디를 대신하는 단 한마디’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영어로는 ‘섬원 투 톡 투(Someone to talk to)’라고 붙여진 이 제목은 모든 외로운 감정을 내포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는 모두 이 사막 같은 외로운 세상을 살며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를 그리워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생을 살면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은, 바로 이런 말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절한 시간에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그것도 기교가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제목이 맘에 들어 본 그 영화는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 사이의 고독을 그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가족이 소통 부재의 삶을 살고 있을까?

짝짓기를 위해 노래하는 수컷 새들 중에는 노래하는 방법을 잊어버려 짝짓기를 하지 못해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이 있다고 한다. 인간인들 그렇지 않으랴. 어떤 존재이든 소통이 관계의 시작이자 완성일지 모른다. 최초의 소통에 관해 생각한다. 어린 시절 우리의 기억 속 최초의 소통은 대부분 사람이 아닌 동물과의 기억일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들끼리의 소통이다. 그만큼 상실의 아픔도 오래 남는다. 거리가 가깝다고 소통이 잘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어머니와의 소통이 원활했다. 기름을 치지 않아도 잘 달리는 자동차처럼 나이 든 지금까지도 참 행복하다. 어머니와 소통이 가능한, 아니 매우 가능한 사람들은 참 복이 많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한때 내게 상처를 줬다고 기억되는 사람들은 어머니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내가 고독한 그들에게 지나치게 화를 낸 건 아닐까?

이런 식의 사고는 아마도 지구의 모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길로 들어서게 할 테지만, 대다수 사람에게 이토록 선한 시간은 가끔 아주 짧게 찾아온다. 인간으로 태어나 잊어서는 안 될 고마운 마음도 그렇다.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히 주어진 것들에 관해 우리는 그리 고마워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부모로부터 집을 증여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인지 모르기 일쑤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알고 고마운 줄도 모른다. 집 없이 여기저기 이사 다니며 한 푼 두 푼 모아 겨우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한동안 뿌듯하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행복을 전달하는 도파민 호르몬은 그리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고 한다. 또 다른 것을 향한 끝없는 인간의 욕망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후유증도 깊게 남겼다.

인간 소통의 절정은 우리가 감동 받은 예술 작품을 통해서일지 모른다. 지난 세대는 앞으로의 세대를 위한 희생물이라는 스티븐 호킹의 말은 꼭 맞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의 자연스럽게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독창적 예술에 비해 지금의 예술가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인위적인 새로움을 연구한다. 새로운 것이 비판받던 세상과 새롭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은 예술가들에게는 똑같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어디 예술뿐이랴.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럴 것이다.

5월이면 우리 인생의 선생님들이 떠오른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기억도 우리의 마음에 남긴 ‘만 마디 말을 대신하는 단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성인들의 말씀이야말로 만 마디 말을 대신하는 단 한마디일 것이다. 오래 살아남아 전해 내려오는 성인들의 마지막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제 다 이루었다”로, 붓다의 마지막 말씀은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로 알려져 있다. 누구에게나 말이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내공이 쌓이고 쌓여 돌처럼 뭉쳐진 진액(津液)이 바로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이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날, 세상의 좋은 날은 다 있는 5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세상은 행복한 이상향이 되기는커녕 사람들의 온갖 불만으로 넘쳐난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문득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봤던 탁발 공양 의식을 떠올린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사실 다 남이 베푸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무것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인간 연대의 끈, 하지만 아직도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에서는 원수를 갚는 시간들이 계속되고, 불심의 나라 미얀마에도 피바람이 불고 있다. 이런 때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하는 슬픈 생각이 든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야말로 어쩌면 가장 종교적인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신이 아닌 아름다운 인간, 예수나 부처가 오늘을 보신다면 너희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개탄할 것이다. 내일은 힘들어도 모레는 괜찮을 거라고. 수고했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내게 그런 말을 해준 가까운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만 마디 말을 대신할 그 한마디가 절실했던,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해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의 기일이 다가온다. 또 숨 막히게 아름다운 5월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