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구름 아래 꽃 45×37㎝, 종이에 먹과 채색, 2020.
■ (77) 아일랜드 더블린
문학은 늙은 타자기처럼 느리고
호텔업 수지타산 도움 안되지만
도로쪽 큰 창가에 작가자리 마련
유별나지 않아도 눈물겹게 감사
조이스·베케트가 글쓰고 茶마신
오래된 테이블에 앉아 책 읽으니
문학 생물체가 사는 숲에 온 느낌
드디어 더블린에 왔다. 오고 싶었던 곳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지금 제임스 조이스와 사뮈엘 베케트가 글 쓰며 차 마시던 곳이라는 호텔 리우 플라자 더 그레셤(Riu Plaza The gresham)의 작가 라운지(Writers Lounge)에 앉아 있다. 커다란 통유리 밖으로는 맑은 종소리를 내며 느린 전기 자동차 트램이 지나가고 신화(神話)처럼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다. 도시의 호텔인데도 마치 전원 속에 있는 느낌이다. 흡사 솔제니친의 숲속 늙은 집필 탁자처럼 오래된 나무 테이블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이 늙은 탁자 위에서 누군가 퍼내고 퍼냈을 상상의 샘물을 생각한다. 이제 더블린을 기점으로 해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까지 올라가 볼 작정이다. 그곳은 내가 청년 시절 이후 연모해마지 않던 C S 루이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육친 같은 그의 문학을 탄생시킨 그 날씨와 공기, 장엄한 대자연 앞에 한 번쯤은 서 봐야 될 것 같아서다.
어쨌거나 작가 라운지라니.
세상을 헤매 돌며 허다한 곳을 거쳤지만 호텔에 작가 라운지란 난생처음이고 말고다. 비로소 문학의 수도라는 곳에 왔구나 싶다. 격하게 이어지던 행려(行旅)의 허리를 펴고 마음의 짐까지 풀어놓는 듯한 푸근함에 젖는다. 라운지에 얇은 책 한 권과 하얀 종이를 펴놓고 있으려니 앞치마 두른 튼실한 여성 종업원이 웃으며 따뜻한 물 한잔을 놓고 간다. 손으로 컵을 감싸 안으니 그 컵의 따스함이 선의(善意)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선 글 쓰는 이가 화폐 가진 이보다 대접받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심코 펴든 책은 그러나 별같이 많은 아일랜드의 작가나 시인이 아닌 비행기에서부터 보던 미국 할머니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이다. 기차 안에서도, 침대에서도 가끔씩 펼쳐 보게 되는 것은 그녀를 뉴욕타임스가 ‘단연코 미국의 최고 시인’이라고 추켜세워서만은 아니다. 시에 무슨 최고가 있고 최저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그 할머니의 아포리즘 같은 짧은 문구들(그녀는 한사코 시가 되기 이전의 낡은 메모장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라고 했지만)이 지니고 있는 기묘한 매력 때문이다.
특히나 내장 안쪽으로부터의 긴장을 풀고 ‘긴 호흡’을 해야 할 때 이 책은 안성맞춤이다. 모든 것이 느리게 가는 더블린에 왔으니 빠른 호흡일랑 거두고 바야흐로 긴 호흡으로 바꿔야 할 때인 것이다.
더블린 시내를 한나절 둘러보고 온 소감은 이 도시가 조이스의 영지라는 느낌이었다. 이 작은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이 네 번이나 나왔지만 더블린의 문학 맹주는 단연코 조이스였다. 도로포장이 마치 그의 율리시스 활자들로 돼 있다고 느껴질 만치 발길 닿는 곳, 부딪치는 곳마다 그의 흔적은 현존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교장 선생님 같은 조이스보다는, 부랑의 삶을 산 베케트에게 꽂히고 오스카 와일드에게 꽂힌다.
한약처럼 알싸한 더블린 커피를 마시며 다시 올리버를 뒤적인다.
“평생 이것 이상은 없었다. 아름다움과 공포.” 아, 아, 그렇고 말고다. 나 또한 이것에 등 떠밀리거나 쫓기며 숨 가빠하지 않았던가.
“모든 문화는 더 오래, 더 잘살기 위해 분투하는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생물체로 성장했다.” 문화나 예술이라는 생물,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분투고 말고. 그러다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생물체”라는 한 줄에 멈춘다. 번쩍 떠오르는 낯선 색채와 형상들, 저절로 그려지는 그림들… 아, 이 한 줄로 적어도 열 점의 그림은 쏟아져 나올 듯한 이 느낌이라니. 그러다 실소한다. 문학의 나라 아일랜드에 와서 웬 미국의 시인이라니 싶어서다. 그러나 한 시인은 그녀를 ‘습지 순찰자’ ‘자연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안내자’라고 했다. 여자 ‘소로’로 불릴 만큼 예술가들의 땅 프로빈스타운에서 숲과 바다를 거닐며 글을 썼던 그녀는 기이하게도 나를 아일랜드까지 안내했던 것이다. 예컨대 그녀의 산문 “… 태양이 남쪽에서 돌아와 햇빛이 강해지면서 마침내 땅은 부드러워지고 …” 같은 한 줄 글에서조차 나는 ‘돌아온 햇빛에 부드러워진 땅’으로 아일랜드를 떠올렸던 것이다.
다시 맑은 종소리와 함께 트램 전기 자동차는 내 눈앞으로 지나가는데 비로소 들풀과 석양과 고요한 푸른 오후를 지닌 이 도시에서라야, 올리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좋은 시가 그 오라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도시의 불안과 쫓김 같은 것 없이 나는 한가하게 써나간다. 그간 화가가 웬 글을 그리 쓰느냐는 시비와 비아냥을 무수히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쓰는 것은 논리나 이성, 무슨 기술 같은 것이 아닌 거의 본능임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느 도시에 가면 나 스스로가 내 굴레로부터 이탈돼 나온 자유가 있다. 더블린에 와서 나는 작가 라운지에 앉아 “쓰는 일”이 “그리는 일” 못지않게 피해 갈 수 없는 내 존재 방식의 다른 하나임을 다시 느끼게 된다. 글자들이 식물처럼 누웠다가 다시 일제히 수직으로 올라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예컨대 살아 있다는 뜻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이제야 비로소 육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문학의 생물체들이 살고 있는 아일랜드라는 비밀의 숲에 성큼 들어선 느낌이다. 그렇지, 이것이 문학이지. 문득 한 번쯤은 나도 ‘긴 호흡’에서 가리킨 대로 “지적인 능란함을 넘어서서 영적 기품을 가지고”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비행하는 한 마리 새를 날아 올릴 수도 있을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도대체 호텔에 어떻게 영혼의 정원 같은 작가 라운지라는 것을 둘 생각을 했던 것일까. 물론 ‘라이터스 라운지’라고 해서 꼭 무슨 작가만이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꾸며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눈물겹게 고맙기만 하다. 문학은 일단 느리다. 그리고 채산성이 맞지 않는 장사다. 강력하고 자극적이고 빠르고 놀라운 것들 속에서 느린 것은 살아남기 어렵다. 번쩍번쩍 흘러가는 영상의 시대에 문자는 낡은 타자기처럼 느려터진 그 무엇이다. 호텔업의 수지타산에 도움될 일이 없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는 그런 문학이 대세인 모양이다. 버젓이 가장 중요한 도로 쪽 큰 창가를 차지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문명의 급류에도 불구하고 살바도르 달리의 굽은 시곗바늘처럼 느린 이 도시의 물줄기는 석양빛을 담아내며 굽이굽이 도시를 적신다. 그러다 급기야 이방인들이 먹고 잠자고 떠나가는 호텔에까지 밀려온 것이다. 오, 문학의 이 도도한 역류여, 세상 어느 도시에 가서 이런 기이한 풍경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시내를 걷다 보니 ‘라이터스 라운지’는 비단 내가 묵는 호텔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러 들어간 또 다른 호텔에서도 ‘비즈니스 라운지’가 아닌 ‘라이터스 라운지’ 팻말이 보인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도 ‘시인의 방’ 혹은 ‘작가 라운지’라는 팻말이 보인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일까 하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문인들의 얼굴로 벽화를 한 더블린 시내의 한 건물.
도쿄(東京)의 우에노(上野)공원 뒷골목을 길게 올라가면 내가 가끔 묵는 ‘수월장(水月莊)’이라는 정원이 딸린 료칸이 있다. 그곳에는 한 계절 그 료칸에 머물며 ‘무희(舞姬)’라는 작품을 쓴 한 소설가의 방이 있다. 그 방에 묵으려면 특별 요금을 내야 한다. 역시 문학으로 수지 타산을 맞추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은 오래전에 예약해야만 한다.
‘문학 라운지’나 ‘작가의 방’은 그 울림마저 따스하다. 가난한 동네에 풍성히 내리는 눈 같은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더블린은 사철 문학의 해가 뜨고 문학의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눈 내리는 세상 너머 또 하나의 세상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문인들 얼굴이 벽화로… 더블린 자체가 문학관
더블린은 문인들의 얼굴로 벽화를 만든 도시. 문인들의 이름을 넣은 펍(Pub)과 바, 카페, 레스토랑 그리고 거리 이름과 호텔 라운지까지 없는 게 없다. 그런 면에서 더블린은 도시 자체가 문학동네이고 문학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세계 문학을 쥐락펴락했던 과거의 작가들뿐 아니라 현재에도 수많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뮈엘 베케트 등 극작가를 많이 배출한 도시답게 크고 작은 극장이 많이 눈에 띄고 심야 공연 등 공연횟수도 많다.
아이리시 음악과 함께 아이리시 문학은 오늘도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어서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노벨 문학상이 이 나라에서 나올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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