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 인터뷰-탁경란 >“126년의 긴 세월 품은 극장 ‘애관’…‘팔지 말라’는 아버지 유언 지켰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인천 중구 개항로에 있는 애관극장 앞에서 탁경란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 폐업위기 몰린 국내 최초 극장 ‘애관’ 대표 탁경란

1972년에 부친이 인수한 뒤
한때 부도로 경매 넘겨졌지만
다시 매입해 20년 넘게 운영

대형극장·코로나로 힘들지만
며칠전에도 노부부가 찾아와
“절대 팔면 안돼요” 신신당부

첫 종두접종·번스타인 연주회
근현대사 관통하는 추억 가득
이젠 인천시에서 운영해주길

“자녀를 출가시키는 부모의 심경이 이럴까요. 과거엔 잘나갔지만 지금은 형편이 어렵다는 말도 쉽게 나오질 않네요.”

폐업 위기에 매각설까지 나도는 인천 애관극장의 대표 탁경란(58) 씨는 지난 15일 어렵게 응한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여러 번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던 그는 극장 본관 3층 영사실 옆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다락방 같은 사무실 한쪽 벽면에 한때 대부호였던 고 탁상덕(1917∼1991) 씨의 영정사진이 빛바랜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걸려 있었다.

인천 1호 도시재생사업이 추진 중인 중구 개항로에 있는 애관극장은 1895년 지어진 실내 공연장 ‘협률사(協律舍)’를 전신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극장이다. 서울 정동의 협률사(協律社·1902)보다 7년, 종로 단성사(1907)보다는 12년이 앞선다. 400석 규모의 복층 구조로 이뤄진 극장 본관은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의 함포사격에 소실됐다가 전쟁이 끝나고 1954년 복원돼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당시 그의 부친이 인수해 “가진 거 다 팔아도 애관만은 팔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큰아들에게 경영을 맡겼고, 외환위기 때 부도로 경매에 넘어간 극장을 막내인 탁 대표가 다시 매입해 20년 넘게 운영해 오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대형 멀티플렉스도 하나둘 문을 닫는 마당에 대를 이어 오래된 단관 극장을 지켜 온 사연을 묻자 탁 대표는 “돌이켜보면 제가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였다”며 말 못한 속내를 실타래처럼 풀어냈다. 어린 시절 영화가 세상 전부였던 토토처럼 그에게도 애관극장은 실존하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코로나19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주변에 스크린만 12개인 CGV가 들어섰을 때도 상영관 하나로 버텼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주말과 평일 구분 없이 400명이 앉는 객석에 관객이 3∼4명일 때가 태반이다. 이제는 기다렸던 개봉작도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Netflix)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안방에서 본다. 그래도 아직은 단 하루도 휴관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지만 매달 수천만 원씩 늘어나는 빚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 매각설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최근에 한 건설사로부터 건물을 팔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이 때문에 극장이 곧 헐릴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과거 문화재 등록을 앞두고 서울의 국도극장과 스카라극장이 갑자기 허물어진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애관은 지금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아버지와의 약속이다.”

―인천 시민들도 애관을 지키겠다고 나섰다는데.

“문화단체와 시민들이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인천 시민들)란 모임을 결성해 10만 명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에 110명의 지역 인사가 참여했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한 노부부가 극장에 찾아와 ‘애관을 절대 팔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노부부는 자신들 취향과 상관없이 1관에서 상영 중인 ‘분노의 질주 9’를 보고 돌아갔다. 그러면서 매번 상영작이 바뀔 때마다 극장을 찾겠다고 했다. 애관은 이분들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극장 안을 둘러보면 영화 포스터보다 티켓박스 앞에서 찍은 여고생들의 졸업사진과 이소룡이 그려진 극장간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까까머리 남학생들의 사진이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애관은 이처럼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추억의 장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탁경란 대표가 아버지 영정사진이 걸린 자신의 사무실에서 애관극장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인천 시민들이 애관을 아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126년이란 긴 세월 동안 시민들이 기억하는 인천의 역사가 애관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무대가 남아 있는 극장 1관에서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이 치러졌고, 첫 종두 접종을 시행했으며, 취업 설명회도 했었다. 이곳 무대에 오른 무용가 최승희 공연과 세계적인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 연주회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가 많다. 그 이전에 남사당패 공연을 이곳에서 봤다는 어르신도 아직 살아 계시다.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에 섰을 때는 동인천역 일대 교통이 마비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름관중’에 ‘만원사례’란 말도 아마 이때 생겼을 것이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집에 변변한 TV도 없던 그때, 이따금 커다란 스크린 앞에 앉아 영화를 보며 울고 웃던 그 시절의 추억이 이곳 단관 극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극장 주인의 막내딸로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성탄절 아니면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 극장을 찾았다. 아무 때나 극장에 갈 수 있다는 걸 모두 부러워했다. 특히 학창시절 ‘청불’(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영사실에 앉아 맘 놓고 볼 수 있었던 건 극장 주인의 막내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종영 때까지 매일 볼 수 있었다. 한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비비언 리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 같은 영화를 12번이나 본 적도 있다. 같은 영화도 반복해서 보다 보니 배우들의 대사도 많이 외웠고 성대모사도 잘했다. 007 시리즈나 청룽(成龍)이 출연하는 홍콩영화를 개봉할 때는 영화 표를 구해 달라는 친구들 청탁에 공짜 빵도 많이 먹었다. 그때 찐 살이 지금도 빠지지 않는다(웃음).”

―‘애관(愛館)’이란 이름에 영화관의 ‘볼 관(觀)’이 아닌 ‘집 관(館)’ 자를 쓰던데.

“사실 애관이란 이름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극장이니 당연히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정도의 뜻으로 알았다. 극장에 관한 옛 문헌 자료를 살피다 애관의 ‘관’ 자가 ‘볼 관’이 아닌 ‘집 관’ 자를 쓴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아마도 애관이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집’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인 것 같다. 저 또한 애관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첫 데이트 때 손을 잡았던 곳 역시 극장 내 객석인 걸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경매로 넘어간 극장을 다시 인수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는 늘 인천 시민에게 빚이 있다고 하셨다. 간척과 염전사업으로 성공해 주유소만 150개를 운영할 만큼 많은 돈을 벌었지만, 딸의 해진 책가방을 직접 꿰매 줄 정도로 검소하셨다. 아홉 살 되던 1972년 아버지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애관극장을 인수했다. 막내딸에게 주는 선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극장이 시민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의 사정을 미리 알고 계시기라도 했는지 애관을 잘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기셨다. 그 약속을 20년 넘게 지켰다. 그 당시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던 김 기사님은 칠순이 넘은 나이에 지금도 영사기를 돌리신다. 6년 전 세상을 떠나신 이인갑(1922∼2015) 관리부장은 86세까지 70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셨다. 그분들이 애관을 지켰다.”

―아직도 영화 표 가격이 다른 극장의 절반 수준인데.

“극장을 재인수한 20년 전 가격 그대로다. 성인 7000원·학생 6000원·조조 5000원을 받는다. 극장 운영이 아무리 어려워도 영화 표 가격은 올릴 수 없었다. 극장은 대다수 서민의 가장 안락한 쉼터고 안식처다. 늘 데이트 자금이 부족한 젊은 연인들에게도, 모처럼 가족과 외식하는 가장에게도 영화 한 편 정도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한다. 애관이 상영관 1개만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연평균 60만 관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애관은 인천의 역사고 시민의 자산이다. 이제는 인천시가 시민을 위해 애관을 운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최초의 극장이란 진가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부산과 광주처럼 인천에서도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렸으면 좋겠다. 또 애관을 통해 제2의 봉준호가 나왔으면 한다. 애관은 지금 그대로도 영화 박물관이면서 아카데미로도 손색이 없다. 이제는 극장 주인이 아닌 조력자로서 애관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

인천 = 지건태 기자 jus216@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