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삶의 의문’ 풀어준 문장을 ‘문학의 聖地’서 만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오십세의 자화상, 종이에 먹과 채색, 35x42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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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더블린, 벨파스트, 런던과 C S 루이스 (下)

‘그분은 새 생명을 만들 때에도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십니다’
삶과 종교에대해 명료히 변증
루이스 논리에 포박당하는듯

‘생명의 강 흘러들어오게 하라’
더블린의 아침 더 풍요로워져

더블린의 호텔에서 맞는 아침. 마치 묵상집의 한 구절처럼 C S 루이스를 떠올린다. 그의 책 ‘고통의 문제’와 ‘헤아려본 슬픔’은 밤에 읽기 좋고 ‘기쁨의 하루’는 제목 그대로 향이 좋은 커피와 함께 아침 식탁에서 만나면 좋다. 그는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크고 강하고 고요한 생명의 강이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 “생명의 강”은 “눈 뜨면 맹수처럼 달려드는” “그날의 소원과 (심지어) 희망까지도 모조리 밀어내야 가능한 것”이라고 썼다.

두꺼운 커튼을 열자 가로수들 사이로 환한 햇빛이 물살처럼 밀려온다. 밤사이에 가라앉아 있던 우울, 행복에의 갈망, 덧없는 희망 같은 것들이 그 강한 햇살 속에 섞여 북아일랜드의 평원까지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다. 그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는 고요한 생명의 강이 흘러들어 올 시간. 아침이 훨씬 풍요롭다.

1층의 한산한 식당에서 갓 구워낸 빵과 진한 커피 한 잔의 식사를 마치고 시내로 나간다. 한 나라의 수도라고는 하는데 우리나라의 전주나 경주 혹은 통영쯤에 와 있는 느낌이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 것은 즐겁다.

아이리시 펍(Pub) 앞으로 천천히 전기버스 트램이 지나간다. 한산한 거리. 천천히 걷는 사람들. 파란 하늘에 솜처럼 떠가는 구름들. 도로 옆으로는 졸졸…맑은 물, 흔들리는 꽃들. 이곳은 도시면서 전원이다.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이 거의 키 높이로 친근하게 서 있고 관광객 두셋이 사진을 찍고 있다. 유리창 저편에 어른거리는 칼 꽂은 3층의 아이리시 햄버거에 검은빛의 에딩거 맥주. 무사처럼 체격 좋은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내 앞을 지나간다. 거리 쪽으로 문을 열어 놓은 펍은 사람들로 차 있고 이야기들로 왁자지껄하다. 저런 저잣거리 이야기들에 상상력이 보태져 소설로, 연극으로 나왔을 것이고 말고다.

나는 유리창이 큰 찻집으로 들어간다. 아침에 만났던 그 진한 커피 향이 몰려온다.

삶의 이 지점에서 돌아보니 마치 사람과 인연 맺듯 책과 맺은 인연들이 쏠쏠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어떤 책은 오래된 사랑처럼 헐겁고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래서 세월이 가도 머리맡에 두고 잠들기 전 몇 줄씩 보게 된다.

물론 허다한 책이 아픈 머리를 더 아프게 헝클어놓고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어떤 책은 인격이 돼 다가왔다.

말을 걸어오고 말을 들어준다. 적막한 밤의 공간으로 가만히 걸어오는 책의 발소리, 숨소리, 기침 소리, 눕고 일어나는 소리들이라니. 나는 소년 때부터 그 소리들과 친숙했다.

C S 루이스.

그의 책에서 나는 그의 체온을 느끼게 된다. 특히 오래된 삶의 의문과 신학적 숙제 같은 것을 쉽고 친절하게 풀어줄 때면 더 그렇다.

일테면 조곤조곤 다가오는 이런 대목에서 나는 포박당한다.

먼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얻었는지부터 생각해봅니다.

… 우리 대부분은 어렸을 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나는지 이리저리 추측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실상을 처음 듣게 됐을 때 그 과정이 워낙 기이하다 보니 선뜻 믿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정돕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명의 진화 과정 역시 기이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분은 성(性)을 처음 만들 때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셨고 따라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 때도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십니다.……(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

얼마나 명료하고 명료한가, 터무니없이 명료한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디로 갈 것이고 사후에도 삶이 지속된다면 어떤 형태일 것인가에 대한 에포케(판단중지) 상태로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이 명쾌한 변증적 논리 앞에 모자를 벗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이었거나(따라서 지금도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미치광이 내지는 그보다 더 못한 자(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

예수에 대한 그의 변증 중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다.

사인·코사인·탄젠트를 줄타기했던 내 10·20대의 교회 생활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늘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시곤 했다. 내 자의식이 생기기도 전 나는 그분의 손에 잡혀 교회를 오갔는데 가끔 돌아보면 내 문제적 기독 청년의 시기에 왜 일찍 C S 루이스 같은 명쾌한 문장들과 만나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 면에서 아일랜드 여행은 내게 성지순례 같은 것이다. 내가 평생 짝사랑하던 문학의 성지이자 한 남자를 통해 기독교라는 지도를 건네받은 성지인 것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빌리 그레이엄 목사·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독자

C S 루이스의 팬들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기독교 변증가”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표를 달아준다. ‘순전한 기독교’가 그 분야의 대표 저작으로 꼽힌다. 그런가 하면 대중에게는 판타지 소설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영화로까지 제작돼 크게 흥행했던 ‘나니아 연대기’ 연작을 통해서다. ‘교통의 문제’ 같은 책은 인문 교양서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 “똑똑하고 위트 있고 친절하고 게다가 은혜롭기까지 하다(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평(評)처럼 뛰어난 문장가면서 동시에 인간적 매력을 많이 지녀 이미 생전에 수많은 평전이 쏟아져나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이 그가 매우 좋아하는 책 중 하나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늦게 만난 아내 조이 데이비드먼과의 짧은 결혼 생활의 사랑과 상실을 일기 형태로 기록한 책 ‘헤아려본 슬픔’은 처음 N W Clerk라는 가명으로 사후 출간됐는데 아내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신앙을 상실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한때 ‘금서’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해 그분에게 다가갔지만… 면전에서 꽝하고 닫히는 문” 같은 구절은 그의 기존 저서들과는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 까닭이다. 1963년 11월 22일 65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침대에서 떨어져 단 몇 분 만에 숨졌는데, 그의 사망 소식은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 암살로 가려졌다. 2003년 그는 성공회로부터 ‘성인’으로 추서됐고 이후 세인트 C S 루이스로 명명되기도 했다. 작가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