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용 기자의 엔터 톡>당연함이 당연해 보이지 않을 때

얼마 전 유튜브 채널에서 2000년대 중반 인기를 끌던 예능 ‘X맨’을 다시 봤습니다. 상대방의 짓궂은 질문에도 “당연하지!”를 외치며 의연한 척 버텨야 하는 코너 ‘당연하지’의 인기에 힘입어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거두던 이 프로그램에서 지금은 톱스타가 됐거나 혹은 방송가에서 사라진 연예인들의 얼굴이 보여 반가웠죠.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불편한 마음이 돋았습니다. 상대방을 당황케 하기 위해 던지는 적잖은 질문이 인신공격이나 성차별적 요소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죠. 요즘은 걸 크러시(girl crush)라 불리며 각광 받을 보이시한 이미지를 가진 여성 연예인을 향해 “너 아들이지? 변성기지? 이발소에서 머리 깎지?”라고 묻고, 덩치가 큰 남성 출연자에게는 “너 사료 먹지?” 혹은 “사료 두고 돼지랑 싸우지?”라고 묻기도 했는데요.

일명 레게 머리(드레드 헤어)를 한 가수를 향해 대뜸 “너 외국인이지?”라고 묻는 장면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지난 6월 중순 유사한 분장을 한 캐릭터가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등장했다가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져 출연 배우와 제작진이 사과했던 일도 떠올랐죠.

따지고 보면, 과거 인기 콘텐츠에는 구설에 오를 만한 장면이 적지 않았습니다. 배우 원빈이 출세작인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좋아하는 여성을 벽에 밀치고 “얼마면 돼? 돈으로 사겠어”라고 외치는 장면은 지금도 숱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되고 있는데요. 만약 요즘 방송되는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나왔다면 데이트 폭력을 지적하고 재벌가 자제의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인식의 변화와 사회적 합의가 참 중요하고, 또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과거 이런 예능과 드라마를 보며 아무런 문제의식도 갖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놀라울 따름입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언행이 10년 후에는 ‘그때 왜 그랬을까?’라고 의아해하는 언행이 될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참 좋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 영화는 2부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제목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죠.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상황을 놓고 등장 인물들의 태도 역시 미묘하게 바뀌는데요.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과연 당연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