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원의 지식카페>자극적 색깔+안정적 곡면…상반된 논리로 구현한 극한의 예술성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세면대의 모습. 자극적인 색깔에 편안한 느낌을 주는 유려한 곡선 형태를 결합한 이 세면대는 라시드의 디자인 철학을 잘 보여준다.

■ 최경원의 세상을 바꾼 디자인 - ⑧ 카림 라시드

강렬한 마젠타 계통 색으로 주목 끌고 직선 아닌 곡선 형태로 편안함 제공…산업디자인 새 기준 구축
일상적 공간을 예술성 가득찬 초현실적 세계로 창조…감각적 차원 넘어 정신까지 매료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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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매력이 맛에서 나온다고 하면 디자인의 매력은 색이나 형태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디자인에는 많은 분야가 있어서 색과 형태의 비중이 분야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패션 디자인이나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색의 비중이 높은 편이고, 산업 디자인의 경우에는 형태의 비중이 훨씬 높다. 주로 무채색으로 만들어지는 전자제품이나 가구, 인테리어 디자인 등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분야에서는 기능이나 생산이 중요하기 때문에 색은 번번이 형태의 뒤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카림 라시드는 색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우면서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그가 디자인했던 겐조(Kenzo)의 향수병을 보면 형태도 아름답지만 눈을 파고드는 듯한 마젠타 색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냥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사실 디자이너가 이렇게 하나의 색상만을 앞세워서 디자인의 매력을 표현한다는 것은 보통 모험이 아니다. ‘진검승부’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이다. 라시드는 이런 마젠타 계통의 색으로 자신만의 매력적인 디자인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가 디자인한 세면대 디자인에서도 마젠타 색이 두드러진다. 마젠타 원색은 아니지만 묘하게 조율된 마젠타 계통의 색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단 하나의 색으로만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은 단지 감각만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색에 대한 많은 경험과 공부가 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이런 디자인을 보면 색 감각만 뛰어나다고 보기 쉽다. 그런데 디자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태를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향수병이나 세면대 색을 빼고 보면 모두 아름다운 곡면으로 디자인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곡면의 형태가 매우 유려하고 아름답다. 그의 디자인은 거의 이런 아름다운 곡면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그가 디자인한 줍(Zoop) 물뿌리개를 보면, 완만하다가도 급하게 휘어지고, 급하게 휘어지다가도 완만하게 흐르는 곡면의 흐름이 값싼 플라스틱 물뿌리개의 몸체로는 너무나 과분해 보일 정도로 잘 조화돼 있다. 색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의 디자인에서 형태도 색깔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쉬워 보이지만 이렇게 단순한 곡면 형태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디자인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보다 몇 갑절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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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라시드는 건축을 공부하려 했는데, 현대 건축의 입방체 형태를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그는 제품 디자인이든, 인테리어 디자인이든, 그래픽 디자인이든 유기적으로 흐르는 곡면 형태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에서 형태는 직선이 하나도 없는 곡선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그는 색에 있어서는 눈을 자극하는 정도가 심한 것, 특히 마젠타 계열의 따뜻한 색을 선호하고, 형태에 있어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순한 형태를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색에서는 주목성이 강한 색을 전면에 내세워 시각적으로 큰 자극을 주고, 형태에서는 최대한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으로 절제하는 것이다. 단순한 곡면의 형태가 확보한 안정감 위에 휘황찬란한 색깔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은 보는 사람의 눈을 무조건 자극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안정감을 동시에 주려 한다. 그의 디자인에서 색이 아무리 튀어 보여도 형태의 안정감이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그의 디자인은 자극적인 이미지와 달리 오랫동안 봐도 피로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라시드 디자인의 진정한 가치나 묘미는 눈을 파고드는 색깔이기보다는 뒤로 빠지면서 보좌해주는 심플한 형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디자인을 깊이 있게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는 눈에 두드러지는 색을 보지 말고 그 뒤에서 받쳐주는 조형적 처리가 어떤지 관찰해보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디자인에서 색채를 다루는 논리와 형태를 다루는 논리는 완전히 상반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단지 감각에 의해서만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매우 논리적으로 디자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깔이 완전히 빠진 솔리움(Solium) 램프를 보면 라시드가 형태를 다루는 솜씨도 색깔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윗부분에서부터 아랫부분으로 흐르는 단순한 흐름만으로도 무한히 매력적인 조명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다. 아울러 라시드 특유의 유기적인 스타일도 잘 표현돼 있다.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캇(KAT) 의자에서도 라시드의 뛰어난 곡면 조형 실력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인체공학적이면서도 조각적인 의자 형태가 돋보이는데, 달걀 같이 견고하면서도 우아한 곡면의 형태가 감칠맛 나는 조형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라시드는 번쩍거리는 금속 소재의 다리와 부드러우면서도 청결한 플라스틱 재질을 대비시켜서 매우 인상적인 이미지를 또한 만들고 있다. 질감대비까지 구현하면서 단순한 의자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조형실력을 탄탄하게 갖춘 위에 그는 자신의 디자인에 극한의 예술성을 구현하고 있다. 2011년에 선보인 이탈리아 나폴리의 지하철역에서 그것이 잘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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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하철역을 보면 그가 이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수준에 올라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눈을 파고드는 현란한 색이나 독특한 패턴과 곡면을 위주로 한 형태는 라시드 특유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 지하철역에서는 그런 감각적인 특징을 넘어서서 정신을 매료시키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우선, 가장 현실적이고 공공적인 지하철 공간이 예술성으로 가득 찬 초현실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색과 형태를 넘어서서 정신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기둥을 사람의 얼굴 같은 조형물로 만든 것이나, 강렬한 벽의 그래픽 처리, 바닥에 들어가 있는 패턴들을 보면 그의 디자인이 이전처럼 시각적인 매력에만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저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오브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초현실적으로 바꾸는 조형요소로서 조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봐도 지하철역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화랑이다.

지하철역 안을 오가는 좁은 통로나 에스컬레이터의 디자인도 예술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들이 모두 초현실적인 세계가 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슨 특별한 장치를 했다거나, 값비싼 장식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현란한 색깔과 패턴, 약간의 소품 등을 동원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장 공공적이고 일상적인 지하철역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예술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라시드는 단순한 조형적 처리만으로도 일상 공간을 영감이 가득한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디자인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선입견이 무참히 깨진다. 대신에 우리의 정신은 매력적이고 새로운 선입견으로 충만해진다. 라시드는 단지 디자인을 넘어서서 우리의 정신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을 통해 철학을 하는 디자이너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 카림 라시드

- 1960년 9월 18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

- 1982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 칼턴대(Carleton University) 산업디자인 학사

-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거장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등에게 배우며 대학원 과정 이수

- 이탈리아 밀라노 로돌포 보네토 스튜디오(Rodolfo Bonetto Studio)에서 작업

- 캐나다에서 7년 동안 칸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스(KAN Industrial Designers)와 함께 일하면서 X선 장비 제작

- 1985∼1991년 바벨 패션 컬렉션(Babel Fashion Collection)과 노스(North) 공동 창립

- 1991년 미국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학교(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서 교수로 재직

- 1993년 미국 뉴욕에 개인 디자인 스튜디오 개설

- MoMA, 퐁피두 센터, SFMOMA 등 전 세계 박물관에 디자인 전시. 20개 박물관에 영구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