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의 정치카페>‘호남’은 단일 정치의식의 전국 유권자조직… 대선 민심, 아직은 ‘판단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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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과 ‘호남 민심’

호남, 오랜 결핍과 정치학습이 만들어낸 전국단위의 ‘디아스포라’… 전략적 선택 통한 권력 창출 레거시
친화성 문제된 이재명은 ‘지지 정체’, 경쟁력 불안 이낙연은 ‘추격 지체’… 새로운 지지 대상 부상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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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를 막론하고 대선 민심의 동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은 호남이다. 특히 여당의 주자들이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호남은 반드시 절대우위를 확보해야 하는 곳이다.

내년 3월 대선에서 호남은 어떤 선택을 할까. 현재 일반 여론조사 기준으로만 보면 이재명이 1위, 이낙연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에 대한 지지는 오랫동안 박스권에 갇혀 있고, 이낙연의 추격은 전세를 역전시킬 정도는 아니다. 이는 여당의 대선주자 가운데 호남이 바라는 조건인 ‘호남 친화성’과 ‘대선 경쟁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물이 없다는 걸 말해준다. 호남의 대권 민심은 지금 ‘에포케(epoche)’, 판단보류 상태다.

◇권력 창출의 레거시

호남의 모든 정치적 선택에는 ‘고립’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광주 기반 정치개혁가이자 ‘호남과 친노’ 저자인 주동식은 “고립에 대한 공포에서 찾아낸 호남인들의 생존전략이 PK(부산·경남) 출신 개혁적 인물과의 연대였다”고 진단했다.

대선과 총선 등 주요 선거국면에서 호남의 선택을 받은 인물은 이 지역 출신 김대중(DJ)을 제외하면 노무현, 문재인, 안철수 등 부산 출신 3인뿐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에게는 16대와 19대 대선 승리를 선사했고, 안철수에게는 20대 총선 당시 미니정당을 40석 가까운 원내 제3당으로 키워줬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호남이 권력을 창출한다’는 레거시가 생겨났다.

문재인과 호남의 애증은 독특하다. 그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가 되고 나서 처음 치른 4·29 보궐선거 때 서울 관악을, 광주 서구을, 경기 성남중원, 인천 서구강화을에서 모조리 패배하자 부인 김정숙 여사가 서울 구기동 자택 밖까지 들리도록 대성통곡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전패의 원인은 ‘호남 유권자의 이반’으로 분석됐다. 이는 문재인과 그의 세력이 호남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됐다. 문재인은 집권 후 ‘호남 우대’에 몰두했고, 이를 토대로 임기 말까지 높은 국정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은 2002년 대선 승리 직후 노무현이 “그 사람들(호남)이 나 좋아서 찍었겠나”라고 했던 발언, 그리고 문재인이 “참여정부는 부산 정권”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호남은 늘 파트너의 배신이 되풀이될 수 있고 언제든 고립될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대선 주자의 조건

호남이 지지하는 대선주자의 기준은 이런 흐름 속에서 배태됐다. 첫째, 누가 호남 친화성을 갖는 우호적 인물일까. 둘째, 누가 본선 경쟁력이 더 클까.

정치적 선택에 있어 호남은 전라도라는 지리적 공간 속에 갇혀 있지 않다. 호남인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불균등발전 속에 고향을 떠나 전국 단위에서 정치의식을 공유하게 된 ‘디아스포라’이자 유권자 조직이다. 이들이 김대중 정권을 만들었고, PK 출신을 지원해 노·문 정권을 만들어냈다. 7개월여 앞으로 닥친 20대 대선에서도 호남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조건을 충족하는 인물의 집권을 도울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호남의 기본적 대선 민심은 ‘전략적 선택과 정권 선호도의 결합’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략적 선택이란 곧 ‘될 사람 밀어준다’는 의미이고, 정권 선호도란 호남 유권자와 정치세력의 상호 친화성이다.

일반 여론조사 기준으로 호남은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낙연에게 높은 점수를 줬지만, 올해 들어서는 이재명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북 안동에서의 ‘영남 역차별’ 발언과 연이어 터져 나온 ‘백제 주체 불가’ 논란으로 이재명 지지 심리가 주춤해진 상태다. 그렇다고 이낙연에게 ‘지지의 전이’가 다시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재명에게 ‘친화성의 결핍’을 느끼는 호남 유권자들은 이낙연에게는 ‘대선 경쟁력의 회의’를 갖는 듯하다. 이재명의 ‘지지 정체’와 이낙연의 ‘추격 지체’는 곧 호남의 전략적 선택이 유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동향과 전망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의 호남 지지율은 6월 1주 30%, 7월 1주 31%, 8월 1주 30%로 여야 주자 중 1등이지만 박스권 안에 갇힌 형국이다. 이낙연은 같은 기간 14- 14- 23%였다. 이재명과의 격차를 좁혔지만 역전을 바라볼 정도는 아니다. 전북 출신의 또 다른 여당 주자 정세균은 5- 7- 6%, 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윤석열은 4- 7- 8%였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명낙 대전’의 두 캠프 모두 겉으로는 “호남 민심은 우리 편”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이재명 캠프의 좌장 정성호 의원은 “누가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큰가, 누가 호남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의 능력을 기준으로 보면 호남 민심은 결국 이재명에게 수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낙연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인 설훈 의원은 “현재 호남 지지 80%를 가져왔다”면서 “골든 크로스(지지율 역전)도 목전에 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30∼40%에 이르는 호남 유권자가 여전히 판단중지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여당 내에 호남 민심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인물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여당 대선 주자의 지지율 변화가 야당 1등 주자인 윤석열의 지지율과 연동돼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윤석열의 지지율이 빠지면 여당 후보 지지율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야당의 경쟁력이 약해지면 여권에서는 누가 후보가 된다 해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심리가 생겨나고, 그 경우 여당 내 후보 순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강윤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 소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여당 후보 지지율은 윤석열의 지지율이 빠지는 것과 연계될 것”이라고 말했다.

◇호남 민심은 판단보류

호남은 오랜 기간 고도의 정치학습으로 선거 때마다 전략적 선택을 해왔다. 2022년 3월에 치르는 20대 대선에서도 호남은 전략적 선택을 할 것이다. 선택의 주인공이 한때는 이낙연인 듯했고, 한때는 이재명인 것처럼 보였다.

호남은 지금의 판단보류를 언젠가는 끝낼 것이다. 현재의 여당 내 투톱이 선택될지, 아니면 여야의 또 다른 누가 새롭게 떠오를지 모른다. 2002년 한 자릿수 지지율의 노무현이 광주에서 대세론의 주인공 이인제에게 대역전극을 펼치고 후보 자리를 거머쥐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전임기자·행정학 박사


■ 세줄 요약

권력 창출의 레거시 : 호남의 정치적 선택에는 ‘고립’에 대한 공포가 있음. 이는 PK 리버럴과의 연대를 모색하게 하고 정권 창출의 레거시를 만들어냄. 하지만 호남에는 늘 파트너의 배신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불안이 있음.

대선 주자의 조건 : 호남은 전라도라는 지리적 공간을 넘어 전국 단위에서 정치의식을 공유하는 ‘디아스포라’ 유권자 조직임. 이들의 대선주자 조건은 누가 더 호남과 상호친화적인지, 누가 더 대선 경쟁력이 있는지 등 두 가지임.

동향과 전망 : 호남은 이재명에게는 ‘친화성의 문제’를, 이낙연에게는 ‘대선 경쟁력의 불안’을 느끼는 듯. 이재명의 ‘지지 정체’와 이낙연의 ‘추격 지체’는 곧 전략적 선택이 중단돼 있음을 뜻함. 호남은 지금 판단 보류 상태임.


■ 용어 설명

‘에포케’는 판단중지, 판단보류라는 뜻. 고대 그리스에서 회의론적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어떤 주장에도 그 반대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판단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 데서 온 말.

‘디아스포라’는 원래 이산(離散)이란 뜻을 가짐.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을 말함. 지금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집단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