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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리뷰 게재 일자 : 2021년 08월 13일(金)
가해는 잊고 피해만 기억하는 ‘이율배반 국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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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일본, 침략·학살은 제쳐두고 ‘원폭 희생국가’ 부각하려 애써
독일도 전후 초반엔 소련군에 의한 ‘獨여성 성폭행’에 주목
“한 나라의 관점 아닌 지구적 차원 연대로 꼬인 역사 풀어야”


지난 11일 폴란드 하원이 국내외의 비난 속에 강행 처리한 법안 가운데 미디어법 못지않게 공분을 자아낸 법안은 행정절차법 개정안이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재산을 빼앗긴 유대계 폴란드인과 그 유족이 이를 되찾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내용이다. 자신들이 2차대전 최대 희생자 민족임을 강조해 온 폴란드의 이율배반적 모습이 당황스러울지 모르나, 훨씬 더한 흑역사도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끌고 갈 때 적잖은 폴란드인이 이를 돕거나 지지했다. 예드바브네라는 마을에서는 폴란드인들이 유대인 이웃 1600명을 학살했다. ‘우리도 희생자다’ ‘나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게 폴란드인들의 공식적 기억이라면, 비공식적인 풀뿌리 기억 속에는 ‘우리 것을 빼앗아간 유대인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왜곡된 인식도 포함돼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우리를 복잡하고 불편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한다. 폴란드인들은 단지 희생자일 뿐인가. 600만 명이라는 폴란드 희생자 수가 ‘가해자 폴란드인’의 죄를 씻을 수 있는가.

초국가적(transnational)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해 온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새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에서 이처럼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일국(一國)적 민족주의의 실상과 한계를 까발린다.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국사의 해체’ 등의 개념을 통해 민족주의 정서에 균열을 내 온 그가 14년간의 작업 끝에 내놓은 민족주의 연구서이자 2019년 출간한 책 ‘기억 전쟁’의 연장이다.

임 교수는 21세기 민족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개념화했다. 이는 “후속 세대들이 앞세대가 겪은 희생자의 경험과 지위를 세습하고, 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들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서사”다. 우리 민족은 희생자 민족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 집단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다.

‘희생자 민족’과 ‘가해자 민족’이라는 이분법은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데,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집단화함으로써 역사 인식을 왜곡한다. ‘희생자 민족 안의 나쁜 개인’이나 ‘희생자 민족이 저지른 다른 민족에 대한 가해’는 설 자리가 없다. 집단 차원의 기억 서사다 보니, 과거사를 경험하지 않은 후손도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긴다. 21세기에도 국가 차원의 과거사 왜곡이 반복되고, 희생자 민족임을 자처하는 나라에서조차 혐오 범죄와 극우 파시즘이 판을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또 자기의 희생만 강조하고 타인의 희생은 외면한다. 누가 더 많이 죽었는지, 누가 더 큰 희생자인지를 놓고 다툴 뿐 과거의 고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없다. 1987년 폴란드를 대표하는 문학평론가 얀 브원스키가 2차대전 당시 폴란드인들의 처신을 비판하는 에세이 ‘가련한 폴란드인 게토를 바라보네’를 발표했을 때, 2000년 예드바브네 학살을 다룬 ‘이웃들’이라는 소설이 발표됐을 때 많은 폴란드인이 분개했던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심지어 2차대전의 명백한 가해자인 일본과 독일에서도 희생자의식이 나타난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 전쟁과 타민족에 대한 학살 등의 기억은 제쳐 둔 채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희생자’라는 사실만 강조한다. 나치에 희생된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가 일본에서 가장 많이(400만 부) 팔린 사실은 일본인들이 자신을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성하는 국가의 이미지를 가진 독일도 전후 초기에는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민간인 사망, 소련군에 의한 독일 여성 집단 성폭행 등에 더 주목했다.

성찰 없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한 집단을 언제든 가해자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선민의식만큼이나 위험하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탄압 등에 거리낌 없이 나서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기억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정치 체제의 변혁을 추구하는 전략은 역사적 파산을 선고받았다”며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다. 그 시작은 국가·민족의 프레임을 넘어 초국가, 나아가 지구적 차원의 ‘기억의 연대’와 ‘기억공동체 구성’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미 긍정적인 성과물이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등에서의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에 경악한 세계시민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을 잡은 것처럼, 전혀 다른 고통의 기억이 연대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보편적 인권이라는 원칙을 세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일을 세계시민의 의무로 끌어올린 스톡홀름 선언(2000년), “너무 일반적이고 익숙해서 둔감했던” 전시 성폭력을 반인륜적 범죄로 못 박은 도쿄(東京)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여성 국제전범재판소’(2000년)로 이어졌다. 이런 기억의 연대를 위해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희생’이 필수적이다.

물론, 지구적 기억의 연대에 동참하는 일은 일제의 희생자라는 의식을 공유하는 한국에도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외면하고, 잊고 살았던 우리의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2차대전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들, ‘요코 이야기’ 논란으로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종전 당시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가 피해의 경중을 무시하거나 양비론을 펴는 것은 아니다. 야만이 아닌 공존의 미래를 위해선 세습적 희생자의식에서 벗어나 ‘이 끔찍한 일은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지만, 내가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라는 자각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호소인 것이다. 640쪽, 3만3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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