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평생 공산주의 연구, 학문적 완벽주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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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1931∼2021)

지난 17일(현지시간) 밤,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지난달 30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기념재단이 주최한 교수님의 90세 생신 축하 모임 사진을 보니 몹시 쇠약해지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다. 지난해 서울에서 출판한 교수님 자서전을 미국에서 받아 보신 후 어린애처럼 기뻐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교수님 자서전을 보면 10대 후반에 직접 목격한 공산주의 운동이 평생 연구 주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교수님은 만주에서 소련군, 팔로군과 중국 공산당, 조선의용군, 조선독립동맹과 직접 부딪쳤다. 또, 1948년 고향인 평양으로 귀환해 소련 군정과 북한 공산당 통치를 겪었으니 소련·중국·북한 공산주의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이런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자들은 그때, 그런 활동을 왜 했는지’에 대해 평생토록 천착하셨다.

교수님의 일생은 미국 장교와 선교사 등의 도움으로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후 반전됐다. 그전에는 전쟁·혼란·고난의 연속이었으나 미국에서는 평화와 안정을 얻었다. 1957년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의 만남, 1962년 다트머스대에서 결혼, 1963년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펜실베이니아대 조교수로 부임, 1974년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저서상인 우드로윌슨재단상 수상(스칼라피노 교수와 공동)을 비롯해 많은 행운이 이어졌다. 이런 행운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교수님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미군 부대에서 중공군 포로 심문을 하면서 전시 연합대학 강의를 열심히 듣고, 영어를 ‘맹렬히’ 공부한 덕택에 미국 유학생활에 성공했다. 더구나 고난의 시절에 익힌 일본어와 중국어가 동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또, 교수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평생토록 식을 줄 몰랐다. 최근 김일성이 소련의 연해주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심층 연구를 하셨는데,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한편, 교수님은 학문적 완벽주의를 추구하셨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또 사건의 원인을 남한이나 북한에서만 찾으려는 좁은 시야를 비판했다. 그리하여 북한과 중국 공산주의 및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에 근거한 실증주의적 분석에 충실했다.

그렇게 교수님의 자료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필자는 교수님의 서재를 정리하면서 1952년 발간된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 창간호 복사본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은 1960년대 서울에 오셔서 인사동이나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데 많은 돈을 들이셨다.

특히, 1945년 해방 직후 발간된 수많은 신문, 잡지, 팸플릿, 저서 등을 집중적으로 모았다. 또, 많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을 면담한 후 녹취록을 만들어 보관하셨다. 그런데 교수님은 한글 자료뿐만 아니라 외국어 자료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본과 중국 자료 외에 러시아 자료를 직접 다루기 위해 러시아어까지 열심히 공부하셨다. 그리고 구소련 해체 후 새로 나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존의 주장을 뒤엎는 새로운 발견을 제시하셨다.

해외 자료에 대한 교수님의 깊은 관심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세계사, 동아시아 역사와 밀접히 연관돼 있어 통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국내 좌·우파들의 잘못된 역사 인식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분절된 해석에 있다고 보셨다.

　교수님이 남긴 많은 연구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국 현대사에 대한 통합적·실증주의적 연구가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곳에선 매순간 치열하게 사셨으니 그곳에선 편안히 지내시길 기원한다.

김용호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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