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자연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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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걷다 보면 문득 하루가 지나고
고개 들어 앞산 보면 1년 훌쩍

꽃피는 봄이 찾아왔나 했더니
어느새 여름 지나 가을이 눈앞

물 흐르듯 순환하는 자연처럼
되풀이하는 일상이 가장 소중

산책을 나갔다. 달맞이꽃 핀 강 길을 거슬러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서 고추밭을 지나 바람 부는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을 내려가면 내가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작은 초등학교 앞 강 건너 마을이다. 능소화꽃이 소담하게 핀 흙담 집을 지나 고샅길을 빠져나가면 마을 앞 느티나무다. 다시 강을 건너고 또 시냇물 하나를 건너서 다시 흐르는 강물을 따라 집으로 올 때까지, 어느 날은 인적 하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물을 거슬러 걷고 흐르는 강물을 따르고, 강물을 건너며 산다. 순응과 거역은 시인의 숙명이다. 벌써 해는 짧아지고 밤은 길어졌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면 산그늘이 강에 내린다. 노을 지는 강을 보며 걷는다. 어떤 때는 심장 뛰는 소리가 강에서 들린다. 노을은 바빠서 금세 금세 색을 바꾸어 가며 사윈다. 길은 어두워진다. 오늘은 달도 없는데, 달맞이꽃은 어두워질수록 샛노랗게 살아난다. 아까 건넜던 강 건너가 보인다. 산 밑에 새로 지은 집 하나가 불을 켠다. 산이 눈을 떴다.

새들이 오늘 할 일은 다 했는지, 배는 부르고 식구들은 집에 다 돌아왔는지, 이웃들도 나와 같았는지, 속상한 일들은 두루 다 해소되었는지 그렇게 새들이 조용할 때 집에 와서 검은 산을 보며 복숭아를 깎아 먹는다. 이 복숭아는 귀농한 이웃 마을 분이 농사지어 가져다주었다. 나는 미안하고 고맙고, 귀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가 누구라고 이 귀한 것을 가져오다니, 나의 마음은 전전긍긍이다.

생각해 보고, 뒤돌아보면 하루가 금방이다. 그 누구의 하루도, 나의 하루도 길고 짧지 않고 모두 다 그 길이로 하루해 아래 살았다. 걷다가 문득 서면 하루였고, 고개 들어 산 보면 일 년이 지나갔다. 그렇게 또 서른이고 마흔이고, 해 지는 나무 아래 서서 나는 일흔을 훌쩍 넘겼다. 나라고, 열여섯 가구 스물대여섯 명이 사는 이 산중에 사는 나라고, 왜 별일이 없었겠는가. 그 누구도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벽이 있고, 넘어야 할 산이 있고, 난간이 있다. 겪을 것 다 겪고 산다. 삶에서 예외는 없다.

보아라! 그리고 또 내일이다. 밭귀에 자리한 호박꽃은 해 없는 아침저녁으로 피고, 어쩌다가 어느 돌담 밑에 떨어져 자라 넝쿨을 뻗어가는 박은 희디흰 꽃을 피우고는 소쩍새와 함께 하얀 밤을 지새운다. 귀뚜라미들이 우는 풀 섶에선 벌써 쑥부쟁이가 피어난다. 꽃피는 새봄인가 했더니 금세 여름이고 벌써 벼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쑥쑥 팬다. 지상의 모든 식물은 이 가을바람 앞에 거침이 없다. 농부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땅에 받아 적는다. 참새와 고추잠자리가 한 가닥 전깃줄에 같이 앉는다.

오이와 가지와 옥수수와 들깨와 고추가 한 밭에서 자란다. 잡풀은 뽑고 뽑아도 또 난다. 옥수수는 어느새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길게 눕고, 참깨는 탈탈 털린다. 고구마는 넝쿨을 멀리 뻗고, 파는 푸른 공기를 온몸에 넣어가며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고구마가 땅속에서 커갈 때 부지런한 손들은 가을을 믿고 배추씨를 땅에 묻는다. 저녁 거미는 거미줄 한쪽 끝에 매달린 채 바람에 날려 저쪽 감나무 가지까지 잇고는 외줄을 타고 건너간다. 참새들은 감나무에서 처마까지 빈 빨랫줄처럼 직선으로 난다. 직선에는 생존의 두려운 냄새가 있다.

오래 끌던 더위도 아침저녁으로 종말이 왔다. 풀잎과 나비들은 햇살의 쇠잔을 안다. 가을 식물들이 삶을 빨리 진행시킨다. 마타리꽃, 물봉선꽃, 고마리꽃이 피고 배춧속은 찬다. 달은 하루가 멀게 차올랐다 하루가 다르게 작아져서 서산에 걸린다. 가을 하늘 달밤은 아름답고 고와서 사람들에게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하고 싶어진다. 가을 달빛에 부서지는 저 서정의 강물을 누가 내게 주었는지, 죽고 사는 저 달빛으로 세상을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의 그 어딘가를 사랑한다. 그것은 나의 짐이고 아픔이다.

감의 얼굴이 나타나고 나와 봄과 여름을 하루같이 동락하던 꾀꼬리는 곧 다른 나라로 갈 것이다. 아내는 풀잎 끝에 맺힌 별을 찾고 땅은 서리를 부르리라. 끝내 못 찾았던 호박이 돌담 위에 숨어 누렇게 익어가고, 무들이 솟아오르는 땅은 금 가리라. 봄비 왔을 때 바랐던 농사는 차례차례 이뤄지고 여름은 지루했으나, 수긍과 긍정의 열매를 세상에 주었으니, 가을이 와서 새들은 다 자란 빈 가지로 독립한다.

나는, 시를 썼으나 나무들처럼 바로 서지 못하였고, 강 길을 걸었으나 청개구리 같은 길동무 하나 사귀지 못하였다. 자그마한 달팽이들이 한 뼘 길을 건널 때, 한 발도 떼지 않은 이슬처럼, 나는 때로 삶이 두려웠다. 어둠은 뛰지 않는다. 만물은 한순간도 생명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자연에 도약은 없다.’ 지난여름 유리창에 부딪혀 땅에 떨어진 작은 새를 손에 쥐어 보았다. 심장의 박동은 두려웠고, 그의 죽음이 나의 온몸으로 따뜻하게 번졌다.

움직임이 세상을 발굴한다. 생태와 순환은 관계가 아니고 우주 끝까지 연결이다. 돌들이 없다면 어둠이 어디서 오고 물고기들이 어디에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새로운 날이 샌다. 그리하여 내게 지난해와 다른 가을이 또 왔으니, 일상의 존중은 생명의 권리장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