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배고픔의 등급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점심을 챙겨 먹었으니 배가 몹시 고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든 먹지 않으면 서운할 듯하다. 이때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배고픔에도 등급이 있으니 ‘허기지다’가 최고의 등급이다. 그 뒤를 ‘시장하다’와 ‘출출하다’가 잇는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입이 심심하다는 표현도 간혹 쓰이지만 그렇다고 정말 입이 심심한 건 아니다.

이럴 때 충청도에서는 ‘입이 구준하다’라고 말한다.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을 달래고 배를 좀 채워줘야 하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에 쓰는 표현이다. 주전부리, 간식, 군것질 이런 것이 당길 때 쓰는 표현이다. 이 유혹을 이기고 시장한 상태로 저녁상을 대해도 좋겠지만 이 구준한 유혹에 굴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격렬한 노동을 할 때는 입이 구준할 틈이 없다. 입에서 단내가 날 즈음에 어김없이 새참이 제공되니 일꾼들은 그 참에 배도 채우고 기력도 재충전해 남은 시간의 일을 마친다. 저녁을 먹은 지 한참이 지난 늦은 밤의 배고픔은 구준함이라기보다는 출출함이다. 특히 마무리해야 할 일 때문에 자야 할 시간까지 일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배가 출출할 법도 하다. 이럴 때는 밤참 혹은 야식이 있으니 그것으로 빈속을 채우고 몰려오는 잠을 쫓으면 된다.

풍족하게 먹지 못하거나 먹은 것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에 느끼는 허기는 그리 반갑지 않다. 그러나 땀 흘려 일하고 난 후에 밀려오는 시장기는 하루를 열심히 산 증표이니 뿌듯하기도 하다. 출출함이나 구준함을 달래줄 수 있을 정도의 삶의 여유는 모두가 누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입이 심심하다’는 쓰기 꺼려진다. 아직도 허기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심한 입을 너무 달래다 보면 비만으로 인한 병을 달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