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지식카페>풍요로운 지상낙원…宋代엔 경극·인형극·무용 ‘멀티플렉스’도 성행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 항주 서호 부근의 풍경. 중국의 배를 불리는 벼농사 발원지였고, 따스한 날씨에 서호의 절경까지 갖춰 항주는 지상낙원으로 꼽혔다.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⑦ ‘세계 최초 시민도시’ 中항주

1275년 인구 이미 100만명 넘어선 당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 ‘와사’·‘구란’서 매일 시민의 문화 공연 열려
서민의 다양한 삶과 원초적 욕망 다루는 노래·연극·소설 인기 끌어… 이젠 ‘알리바바’ 등 디지털 경제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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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항주(杭州)는 ‘지상에 구현된 천국’이다. 도연명의 도화원이 꿈속의 이상향이라면, 현실의 이상향은 소주(蘇州)와 항주, 좁히면 항주 서호 주변이다. 중국인들은 이를 한 줄로 압축한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발원지답게 항주 주변은 당나라 이래 중국의 배를 불리는 곡창지대였고, 따스한 날씨에 서호의 절경까지 갖춰 지상낙원으로 꼽혔다. 타고난 탐미가인 북송 휘종은 항주의 아름다움을 개봉에 재현하고자 소항응봉국(蘇杭應奉局)을 둬 강남의 진귀한 꽃과 기이한 돌을 수집했고, 청나라 서태후는 북경(北京) 이화원에 곤명호를 조성해 인공 서호를 만들었다. 조선 선비들은 ‘서호십경도(西湖十景圖)’를 벽에 걸어 둔 채 함께 감상하는 상상의 여행을 떠났다.

항주는 7세기 초 수양제가 건설한 강남 운하의 남단에 자리하면서 역사의 중심에 들어섰다. 도약의 시작은 10세기 초 오월국(吳越國) 때였다. 소금 장수 출신인 전류(錢)가 개국한 오월은 운하와 바다를 이용한 동아시아 교역 패권을 노렸고, 이를 위해 전당강 하구에 항구를 건설한 후 항주를 수도로 삼았다. 1129년 여진에 밀린 송나라가 장강을 건너와 항주에 자리 잡은 후, 항주는 점차 세계적 도시로 발전했다. 중원의 뛰어난 문화와 강남의 풍부한 경제가 결합한 결과였다. 해양 무역로인 ‘도자기의 길’을 타고 전 세계 상인이 몰려와 ‘황금의 나라’ 중국에 들어섰다. 몽골 제국이 동서양을 하나로 잇고, 북경과 항주를 운하로 연결하자 항주는 번영했다.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등 수많은 견문가가 항주에 와서 그 풍요에 매혹됐다. 마르코 폴로는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최고의 도시’라 불렀고, 이븐 바투타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로 기록했다.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1275년 항주 인구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선 당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송나라는 지방 군벌을 억제하려고 강간약지(强幹弱枝), 즉 줄기를 강화하고 가지를 약화하는 수도권 중심 정책을 썼다. 이에 따라 수도 주변에 군사가 밀집하고, 그 가족들 수십만 명이 이주했으며, 그들의 삶을 떠받치는 상인, 장인, 예인, 용인(傭人)이 거리를 채웠다. 인구의 집적은 소비와 문화의 융성을 가져왔다.

항주는 행정 도시나 군사 도시가 아니라 세계 최초의 시민 도시였다. 천자의 도시였던 당나라 장안(長安)이 구역별로 역할을 정해 두고 백성을 일일이 통제한 계획도시였다면, 항주는 시민들 바람에 따라 주거지와 상업지가 뒤섞여 자연스레 발전하는 현대적 개방 도시였다.

사(詞)의 일인자 유영은 항주의 번화를 찬미했다. “안개 낀 버드나무와 색칠한 다리,/ 바람에 날리는 발과 비취색 휘장,/ … 가게마다 진주와 보옥이 널려 있고/ 집마다 비단옷이 넘쳐나 호사를 다툰다네.” 명나라 때 표류해 이곳을 들렀던 최부에게 항주는 별천지였다. “집들은 잇닿아 행랑이 되고, 옷깃들은 이어져 휘장을 이루었다”(‘표해록’). 항구엔 상아, 산호, 진주, 향료, 후추 등 진귀한 물건을 실은 외국 배들이 빗살처럼 늘어서 장관을 연출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체제의 인간과 달리, 도시민은 신분에 맞춰 살지 않고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좋은 집을 지어 서화, 도자기, 장식품으로 사치스레 꾸미고, 문양 예쁜 비단옷(綾衣)으로 몸을 감싸고 보석으로 치장한 채 찻집에서 용정차를 맛보고, 꽃집에서 사계절 내내 귀한 꽃들을 관상하고, 야시장에서 미식을 즐겼다.

항주의 문화 중심은 극장이었다. 공연이 장안에서는 황제와 귀족의 문화였다면, 항주에서는 와사(瓦舍)와 구란(勾欄)에서 매일 열리는 시민의 일상 문화였다. 와사는 경극, 인형극, 곡예, 무용 등이 연출되는 ‘멀티플렉스’ 공연 시설이고, 구란은 와사 내부의 공연 무대다. 와사 하나에 구란 여러 곳이 있어 경쟁이 치열했다. “우아한 자태는 나긋나긋/ 고운 눈빛은 살랑살랑./ 어여쁜 미소는 여전한데/ 만날 뜻이 있는 듯.” 유영은 과연 배우를 만났을까. 와사 주변에는 식당, 술집, 찻집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상인들이 쉼 없이 손님을 불러댔다.

“나들이옷 깨끗이 차려입고 길 나서는 사람들, 거리를 메우며 지나는 호화로운 수레들, 과일바구니 꽃바구니를 멘 채 다투어 소리치는 장사치들, 사람들 태반이 극장에 있네.” 유극장이 전하는 공연 날 풍경이다. 안온한 평화와 경제적 풍요 속에서 날마다 사람들은 날이 저물도록 오락과 유희를 즐겼다. 중원 회복의 꿈이 잊혀 가자 애국 시인 육유는 비통히 노래했다. “권세 있는 자들이 노래와 춤을 즐기니/ 마구간 말들은 살쪄 죽고 활은 줄이 끊겼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 항주 서호의 정자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문학도 고상한 언어로 이상적 관념을 이야기하는 시문(詩文)에서 시정의 언어인 백화(白話)로 시민의 다양한 삶과 원초적 욕망을 다루는 노래(詞)와 연극, 소설로 옮아갔다. 이로써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도시의 일상이 생생한 언어를 얻었다. 출판 역시 활발해졌다. 매일 만 쪽의 책이 인쇄돼 서점에 진열되자 사람들은 경전뿐 아니라 소설, 시문집, 의서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전업 작가가 등장하고, 음란하고 저속한 대중문학이 우아하고 고매한 귀족문학을 압도하는 시대가 열렸다. 유영은 노래했다. “청춘은 잠깐인데/ 어찌 헛된 명예를 쥐고자/ 술잔 비우고 노래하는 즐거움과 바꾸겠는가.”

항주 거리가 욕망의 진열장이라면, 서호는 꿈의 원천이었다. 서호에서 사람들은 경치가 아니라 꿈을 보았다. 서호는 현실 안에 있으나 그 바깥의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헤테로토피아였다. 아이가 옷장 속 어둠에 매혹되듯, 서호는 절경으로 사람들 마음을 꿈꾸게 했다. 백거이가 처음이었다. 백제(白堤)를 쌓아 서호 물길을 다스렸던 그는 호수에 영원히 붙들린 마음을 시로 남겼다. “내가 아직 항주를 떠나지 못함은/ 반쯤은 호수가 나를 붙들기 때문이지.” 소제(蘇堤)를 쌓아 치수에 성공했던 소동파는 서호에서 서시의 미를 보았다. “물빛 찰랑찰랑 맑아서 좋았는데,/ 산색 흐릿흐릿 비 내려도 멋있다네.” 진짜 미인은 꾸며도 안 꾸며도 예쁘듯, 서호도 날씨와 상관없이 사시사철 아름답다.

서호는 인간의 꿈을 빨아들였다. 서호에는 악비의 무덤인 악왕묘가 있고, 남방 불교의 수천 년 중심인 영은사가 있고, 매화를 아내로 맞고 학을 아이 삼아 지냈던 임포의 숲이 있고, 단교와 뇌봉탑에 서린 ‘백사전’의 전설이 있고, 집안 탓에 억지로 헤어진 사랑을 이루려 연인의 무덤까지 따라 들어간 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이 있다. 유가의 충효, 불가의 탈속, 도가의 은일, 민속의 신비, 세속의 애욕이 모두 서호에서 자신의 꿈을 꾸었다. 꿈이었기에 그림 같았으나 그림 같은 현실이라서 사람들은 호상주인(湖上主人)으로 살아가기를 더욱 강렬하게 열망했다.

사람들은 악비처럼 충절을 바쳐 청사에 이름을 올리고 싶었고, 영은사 포대 화상처럼 공덕을 쌓아 해탈하고 싶었고, 고산(孤山)의 임포처럼 속된 일을 잊고 참된 흥취를 즐기고 싶었고, ‘백사전’의 백소정을 만나 기이한 모험과 사랑을 나누거나, 양산백과 축영대처럼 “이승도 저승도 쌍으로 날아다닐” 불후의 사랑을 간직하고 싶었다. 베이징(北京)에도, 도쿄(東京)에도, 서울에도 서호를 본뜬 공간이 있고, 한낱 선비조차도 ‘서호도(西湖圖)’를 소장하고 싶어 했던 이유다. 사람들한테는 서호가, 즉 꿈이 필요했다.

남송 말 오자목이 항주의 번화한 풍속을 기록한 책이 ‘몽량록(夢粱錄)’이고, 300년 후 명말 청초의 문인 장대가 사치했던 항주 시절을 회고한 책이 ‘도암몽억(陶庵夢億)’이다. 둘 모두에 ‘꿈’이란 글자가 들어간 게 결코 우연은 아니다. 항주와 서호는 안온한 평화를 누리면서 지극한 행복 속에서 헤엄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한 꿈을 담고 있다.

명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수백 년 동안 항주는 ‘대운하 시대’의 중심 도시로 번영을 거듭했다. 1861년 항주에 위기가 찾아왔다. 태평천국의 명장 이수성의 군대가 항주를 포위했다. 몇 달 만에 10만 명이 굶어 죽고, 약탈로 도시 전체가 불타올랐다. 거상 호설암의 도움을 받아 군비를 조달한 청나라 군대는 태평천국을 간신히 물리치고 항주를 수복했지만, 이후 장강 하구 지역의 경제 중심은 상해(上海)로 옮아갔다. 상인과 시민의 도시 항주는 20세기 내내 웅크렸다, 최근 중국 디지털 경제의 중심으로 눈부시게 성장 중이다. 알리바바의 마윈, 하이크비전의 후양종 등은 그 상징이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대운하시대 : 수양제 때 처음 만들어진 중국 대운하는 황하와 장강을 인공수로를 통해 연결한다. 명과 청이 항주와 북경을 잇는 경항대운하를 조운과 물자를 유통하는 제국 경제의 동맥으로 삼으면서 중국에는 ‘대운하시대’가 열린다. 조영헌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대항해’가 필요 없었다. 운하를 타고 오가는 배에 넘치는 물건들, 물길 따라 번성하는 도시들, 은과 교역품을 싣고 항주·광주 등을 찾는 외국 상인들…. 중국 내부의 유통량이 유럽 전체의 유통량을 압도했다. 건륭제는 교역을 원하는 영국 사절단에게 말했다. “우리는 너희 나라 물건이 조금도 필요치 않다.” 모든 게 있기에 굳이 바다로 나가 모험하지 않았고, 15세기 초 아시아 바다를 장악했던 정화의 함대도 폐기해 버렸다. 중국과 유럽의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