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조기·몰입교육’ 아이들에게 되레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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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의 아이들 | 조지은·안혜정·최나야 지음 | 사이언스북스

글로벌大 한인교수 3인의 조언
한국어 먼저 든든히 자리잡은뒤
영어 조화시키는 ‘이중 언어’로

좋은 교사는 원어민이 아니라
의욕·동기 부여하는 교사여야
아이들이 ‘콩글리시’ 쓰는 것은
영어에 친숙해지고 있다는 증거

아이의 영어 학습은 한국인 모두의 관심사다.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꽤 많은 돈을 쏟아붓지만, 만족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가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꼭 먹다가 얹힌 송편 같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인 나와 달리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아이로 기르는 일은 늘 스트레스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청년으로 자랐으나, 꿈을 이뤄주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기적의 영어 학습법’을 찾는 일은 여전히 모든 한국인 부모의 강박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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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아이들’은 다른 어느 영어 학습서보다 믿음직스럽다. 언어 습득과 관련한 학문적 근거가 탄탄할 뿐 아니라 세 사람 모두 아이 엄마로서 겪었던 경험적 사례와 풍부한 노하우까지 들려준다. 영어 학습의 경로는 형편에 맞게 택할 수 있으나 영어 학습의 기본 원리와 관련해 이 책보다 훌륭한 책은 많지 않다. 글로벌 영어 학습법의 강자 세 사람이 뭉쳐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조지은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안혜정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 최나야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세계적 대학에서 영어 교수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다. 이들의 공통 관심사는 ‘이중 언어’다. 영어를 모어가 아니라 외국어로 배우고 익히는 아이들을 위한 최적의 학습법과 학습 과정에서 아이 마음에 일어나는 기쁨과 경이, 불안과 공포 등을 연구한다.

오늘날 영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다. 2020년 기준으로 약 12억6800만 명이 영어를 모어 또는 제2언어로 쓰고, 전 세계 195개국 중 67개국이 공용어로 사용하며, 유엔 등 많은 국제기구의 공식 언어다. 전 세계 웹사이트 상위 1000만 개 중 약 60.5%가 영어로 쓰여 있고, 영어 전문서적을 통해 언제든 최신 지식을 접할 수 있다. 사실상 세계 공용어기에 영어를 할 줄 알면 많은 나라에서 근무하거나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국내외 글로벌 기업에서 일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에 무척 유리하다.

영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와 동기는 알기 쉽지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영어를 잘할 수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영어 공부를 언제 시작해야 하는지, 영어유치원을 보내면 좋은지, 원어민 교육은 필수인지, 좋은 발음이란 무엇인지, 문법 공부는 꼭 해야 하는지, 콩글리시를 고쳐야 하는지 등 물음은 끝없다. 질문에 하나씩 답하면서 이 책은 아이가 주인이 돼 도구로 영어를 사용하는 ‘아이의 영어’가 아니라, 영어가 주인이 돼 아이를 괴롭히는 ‘영어의 아이’가 돼버린 비정상적 학습 상황으로부터 아이를 해방하는 건강한 학습법을 안내한다.

저자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영어 교육의 핵심 비법은 영어로 듣고 말하는 게 즐거워질 수 있도록 아이를 돕는 것이다. 영어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영어 조기 교육이나 몰입 교육은 아이의 정서나 인지 발달에 해롭다. 오히려 한국어가 든든히 자리 잡은 후에 영어를 조화롭게 쓰는 법을 배우는 편이 좋다. 옥스퍼드대 외국인 교수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중 언어는 아이의 경쟁력이다. 조기 유학보다 아이와 영어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외국 여행을 함께하면서 부모가 자신 있게 영어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간단한 인사말 등을 익히게 하는 쪽이 괜찮다.

비원어민으로 원어민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자들이기에 저자들은 원어민 타령의 허구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억지로 혀를 굴리는 이른바 ‘미쿡식’ 발음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처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또렷하고 유려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발음이다. 파닉스 학습은 잦은 반복보다 원리 중심으로 가볍게 하는 것이 좋고, 학원보다는 다양한 발음을 제공하는 인터넷 영어 사전이 더 도움이 된다. 발음 자체보다 소통이 중요하다. 좋은 교사는 원어민이 아니라 아이의 학습 의욕을 고취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이중 언어 사용자다. 영어 교사 자격증 확인은 필수다.

매주 단어를 수백 개씩 외우게 하거나 문법 학습에 치중하는 것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단·복수, 관사 쓰임 등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단어 수보다 맥락에 맞는 자유로운 활용이, 정확한 문법보다 씩씩한 소통이 더 의미 있다. 코드 스위칭 현상인 한국 영어, 즉 콩글리시는 아이가 영어에 친숙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영어는 다국적 언어다. 한국인답게 영어를 쓰는 것은 창조적 활동으로 오히려 큰 장점이 된다. 언어는 문법이 완벽하냐 아니냐,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의 문제다. 억지로 문법에 맞추려고 하면 ‘영어 울렁증’이 생긴다. K-팝을 더 즐기고 싶어서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처럼, 말이 통하는 즐겁고 긍정적 경험이 쌓이면 호기심이 유지되면서 공부도 저절로 꾸준히 하게 된다.

점수를 위해 공부하면 안 된다. 아이에게 봉사활동·캠프 등을 통해 국내외 외국인 아이와 교류할 기회를 제공하고, 동화·소설·논픽션 등 다양한 장르의 영어책을 읽거나 영화도 보고 게임을 하면서 영어를 즐겁고 자연스레 익히도록 해야 한다. 아이 혼자 영어 동영상을 보게 하는 것보다 부모가 정성껏 고른 좋은 책을 읽어주는 쪽이 학습에 효과적이다. 이때, 발음은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말과 섞어 말해도 괜찮다. 아이는 상호작용 속에서 언어를 배운다. 쓰기는 천천히 배우되, 일기나 에세이 중심의 글쓰기보다 실제 사회환경에 가까운 다양한 글쓰기를 해 보는 게 좋다.

이 책은 아이의 영어 학습법을 언어학·심리학·교육학·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적 각도에서 살피면서 영어 학습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고 선입견을 바로잡는다. 영어 학습 열풍에 고통받는 부모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면서 방향을 잡아주는 복음 같은 책이 나왔다.

장은수 출판평론가